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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립식 통일기금 만들자 ① 통일기금 적립 지금부터 해야

중앙일보 2010.09.06 01:06 종합 4면 지면보기
#장면1=20XX년 2월 초순 북한에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휴전선 북측 곳곳에 집결한 탈북 행렬에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얼어 죽고 굶어 죽는다. 남쪽으로 가는 길을 열어라. ” 대통령은 긴급명령을 발동했다. “육·해·공 모든 수단을 동원해 휴전선 이북 30㎞ 지점부터 중국·러시아 국경 이남 30㎞ 지점까지 쌀과 생필품을 무제한 공급하라.” 북한 주민을 북한 안에 묶어두려는 긴급 조치였다.


남북 해빙 땐 통일 종잣돈, 북한 급변 땐 긴급 구호비 … 일 터지면 이미 늦다

2002년 1월 17일자 1면.
문제는 돈. 예비비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정부는 전시 예산에 준하는 긴급예산 편성에 나섰다. 부랴부랴 국채를 발행했다. 주요 연·기금 등이 국채를 샀다. 한국은행에서도 수십조원을 긴급 차입했다. 외화도 필요했다. 고기류·채소류·유류·비상약품 등을 수입하기 위해서다. 급한 대로 외환보유액 가운데 200억 달러를 뽑아 쓰기로 했다. 그러자 술렁이던 금융시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을 팔아치웠다. 주가는 연일 하락했다. 덩달아 원화 값, 국채 값이 급락했다. 빠져나가는 달러 탓에 외환보유액도 급감했다.



금융감독원 뉴욕사무소로부터 급보가 날아들었다. “S&P 등 신용평가사들이 한국신용등급을 서너 단계 떨어뜨릴 가능성이 있다.” 심상찮은 조짐에 청와대에서 긴급 비상경제대책회의가 소집됐다. 범정부 차원의 대외 투자설명회(IR)도 개최했다. 그러나 쏟아지는 이런 질문엔 말문이 막혔다. “막대한 통일비용은 결국 세금으로 메워야 할 텐데 한국 정부와 국민은 그럴 준비가 돼 있는가.” 2월 하순, 신용평가회사들은 일제히 한국 신용등급을 한두 단계씩 떨어뜨렸다. 북한보다 먼저 한국 경제가 무너질 판이었다. 국가 경제 운용 관점에서 기획재정부 실무자들이 그려본 북한 비상 사태 시나리오다.



2008년 5월 31일자 1면.
#장면2=2012년 1월 청와대는 한 달 후 평양에서 열리는 3차 남북정상회담을 전격 발표했다. 북·미 양자회담과 6자회담을 통해 북한 비핵화가 중대 진전을 이루고 있는 와중이었다. 정상회담 발표와 동시에 북한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비난과 군사적 도발 위협을 중단했다. 남북 관계는 순식간에 급반전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정상회담에서 개방·개혁에 대한 남측의 지원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이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도로·철도·항만 보수도 요청했다. 직후 개성공단엔 추가 입주를 요구하는 기업들이 몰리며 수백억원의 남북협력기금 대출을 요구했다. 부지 조성에만 2억 달러에 건축비·기반시설 구축 등으로 25억 달러가 들어가는 개성공단 2단계 개발 사업도 시작됐다. 남북 정상이 합의한 해주 특구 조성 사업엔 몇 조원이 들어갈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지난 7월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올해 남한의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33.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치보다는 낮다. 아직까지는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라는 평가지만 이는 ‘북한 변수’를 배제했을 경우다. 이보다 한 달 전 미래기획위원회는 갑작스럽게 남북이 통일할 경우 2040년까지 북한에 투입될 재정을 2조1400억 달러로 추정했다. 이 경우 2040년 국가채무비율은 147%에 이른다. 가뜩이나 출산율 감소와 고령화, 복지 지출 증가로 돈 쓸 곳은 늘고 있는데 북한 변수까지 발생하면 정부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분단 때문에 이미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있는 상황에서 갑자기 통일을 맞으면 단기적으로 부채비율이 급등하고 재정건전성이 급속히 악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부터 통일 기금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얘기다.



반대로 남북 관계가 급격히 개선돼도 문제다. 해마다 1조1000억원가량의 남북협력기금이 조성되지만 단발성 사업 예산이다. 남아도 적립이 되지 않는다. 7000억∼8000억원이 들어가는 쌀·비료 지원, 대북 경협기업 대출과 민간 대북협력 사업 등에 사용하면 얼마 남지가 않는다. 정작 중요한 대형 남북 경협 사업은 엄두도 못 낸다. 분단비용은 물론 통일비용도 줄이는 대북 전략 투자를 위해서도 통일기금 마련이 필요한 이유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북한학)는 “통일비용은 결국 남북 간 격차를 줄이는 데 드는 비용”이라며 “통일 이후가 아니라 통일 전부터 격차 해소에 나서야 한다”고 말한다. 중앙대 신창민 명예교수(경제학)도 세미나에서 “북측 지역 사회간접자본(SOC)을 위한 투자는 통일 후 어차피 해야 할 부분”이라며 “정부는 지금부터 통일이 올 때까지 남측 GDP의 0.7∼1% 규모를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한경환·허귀식·이영종·채병건·정용수·이철재·정효식·남궁욱·전수진·천인성·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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