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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68) 어느 빨치산 가족

중앙일보 2010.09.06 00:57 종합 10면 지면보기
겨울 산은 남쪽과 북쪽 경사면의 온도 차이가 뚜렷하다. 햇볕이 제법 긴 시간 동안 내리쬐는 남면(南面)은 그렇지 않은 북면(北面)에 비해 훨씬 따뜻하다. 겨울 산의 북면은 햇볕이 좀체 찾아들지 않아 매우 춥다.


‘환자트’엔 폐병 말기의 빨치산
아들 간병 위해 입산한 70대 노인
“자식 편안히 가게 해달라”
아버지의 애원에 총을 들었다

따라서 빨치산이 모여 있던 곳은 대개가 지리산 남사면(南斜面)이었다. 모진 추위 때문에 북사면은 피한 것이다. 많은 빨치산이 발각될 염려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남쪽 비탈에 갈대와 낙엽 등으로 위장한 아지트를 만들어 그 속에 몸을 숨겼다.



이념을 좇아 빨치산이 되어 신생 대한민국에 총구를 겨눈 사람이야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 대한민국 법의 엄정한 틀에 세워 심판을 받게 해야 한다. 만약 극단적인 반항을 계속한다면 그는 토벌대의 총구 앞에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지리산 남면을 담당한 사단은 수도사단이었다. 그 예하의 26연대 1대대 2중대 3소대장이었던 장창호(예비역 준장) 중위의 경험담은 빨치산과 그 주변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다.



1948년 10월 여수와 순천의 14연대 반란 사건이 벌어진 뒤 작전을 위해 출동한 군인과 경찰이 여수에서 부상당한 주민들을 치료해주고 있다. 미국의 사진잡지 라이프에 실린 사진이다. 51년 12월 벌어진 대규모 지리산 토벌 작전에서 군경은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적극적으로 취했다.
‘백 야전전투사령부’ 빨치산 토벌의 1기 전반기 작전이 지리산을 전면적으로 수색하는 형태로 펼쳐졌다가 막을 내린 뒤 중대 규모로 고지대의 골짜기와 숲을 뒤지는 후반기 작전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그는 이른바 ‘환자트’를 발견했다. 일종의 아지트지만 환자들을 수용하는 시설이라고 해서 그렇게 부르는 곳이었다. 다른 아지트와 마찬가지로 빨치산들은 물줄기가 인접한 곳에 은닉처를 만들었다. 국군 수색팀이 발견한 상당수의 아지트는 안이 텅텅 비어 있었다. 빨치산이 식량과 다른 물자 등을 대부분 버려둔 채 도망을 쳤던 것이다.



장 중위는 후반기 작전 나흘째인 12월 10일쯤에 대성골의 한 골짜기를 수색하다가 환자트를 발견했다. 부대원 한 사람이 용변을 위해 숲 속으로 들어가 비탈을 오르려다 위쪽이 잘린 대나무를 우연히 잡았는데 힘없이 그대로 쑥 빠져 버리더라는 것이다.



소대장은 점심을 먹던 대원들에게 일단 비상을 걸었다고 했다. 부대원이 대나무를 뽑아 온 지역을 포위한 뒤 대나무를 하나씩 뽑는데 모두 아무런 힘없이 뽑혔다. 비탈 위에 올라서서 자세히 보니 갈대 등으로 겉을 위장한 움막 세 채가 보였다. 능선 쪽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고 계곡에서 비탈을 오르면서 봐야 겨우 알 수 있는 빨치산 아지트였던 것이다.



부대원들은 그곳에서 도망치는 빨치산 2명을 사살했다. 이어 움막을 향해 집중 사격을 하고 있는데 흰 깃발이 올라왔다. 사격을 중지한 뒤 다가간 부대원들은 70세가 넘어 보이는 노인 한 사람을 발견했다. 거의 죽어가는 바짝 마른 남성 1명과 여자 4명도 함께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둔 마른 남성이 빨치산, 노인은 그의 아버지, 여인들은 빨치산의 아내와 과부가 된 형수 둘, 그리고 딸이었다. 빨치산 남성은 폐병을 앓은 지 오래여서 살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노인은 위로 두 아들이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목숨을 잃었고 셋째 아들마저 입산한 뒤 죽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며느리들과 손녀를 모두 데리고 아들을 보살피기 위해 산속에 들어왔다고 했다.



3소대는 이들을 데리고 이동했다. 여자 아이를 소대장이 등에 업고 폐병 환자인 빨치산은 들것에 실었다. 그러자 부대 이동 속도가 크게 늦어졌다. 무선으로 계속 이동이 지체되는 상황을 보고하는 소대장을 보고 있던 노인이 장 중위에게 다가와 “저놈은 이미 병이 깊어 데려가도 살지 못한다. 제발 여기서 편안히 죽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결국 그 빨치산은 의식조차 없는 상태에서 사살돼 그 자리에 묻혔다.



장 중위는 아비 된 사람으로서 자식을 자신의 손으로 묻기 위해서 노인이 그런 부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모두 부성(父性)에서 비롯했을 것이다. 그들은 울음을 터뜨리면서도 몇 번이고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 표정은 아주 진솔했다”고 회고했다.



토벌대가 마구 사람을 죽였고, 특히 걸을 수 없는 사람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했다는 소문이 빨치산을 중심으로 한동안 많이 퍼졌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장 소대장의 회고에서 보듯이 당시의 국군 토벌대는 가능한 한 사람을 살리고 보자는 식의 작전을 벌였다. 무고한 생명을 함부로 사살하지 말라는 야전전투사령부의 지침이 각 부대에 분명히 전해졌고, 각급 부대는 이를 충실히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지리산의 최고봉인 천왕봉을 비롯해 제석봉·연하봉·삼신봉·촉대봉을 잇는 동부 능선의 험한 골짜기는 당시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았다. 1기 후반기 작전에 들어간 토벌대는 이런 지역까지 샅샅이 훑었다. 토벌대의 이런 작전으로 빨치산은 몸을 숨길 곳이 사라져 갔다.



심리전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남원 사령부에 있는 방송팀은 전파에 귀순 권고 내용의 목소리를 실어 부지런히 지리산 위로 송출했다. 수색 과정중에 지리산 세석 근처에서 빨치산이 지니고 있던 제니스 라디오 한 대를 발견했던 점을 보면 부분적으로 우리의 방송팀 선무공작 내용은 그들에게 전달됐을 가능성이 있다.



정찰기에서 내보내는 방송도 한몫을 했다. L19 등 경비행기에 확성기를 달아 “항복하면 살려준다”는 내용의 방송을 계속했다. 아울러 지리산 산골을 누비는 토벌 부대들도 확성기를 메고 다니면서 현장에서 귀순을 권유하고 다녔다. 산골에 살던 주민들에게도 “빨치산에 협조하지 말라”는 경고 방송을 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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