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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유위진 회장 아들 유재응씨의 증언

중앙일보 2010.09.04 00:28 주말섹션 2면 지면보기
j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역사의 아픔을 사랑으로 함께 한 두 사람’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는 다섯 번 결혼했습니다. 첫째 부인인 위안룽이 일본 군관의 사생아를 뱄고, 화가 난 푸이는 그 아이를 아궁이 불에 던졌다고 자서전에서 밝힙니다. 결혼은 모두 순탄치 않았지요. 푸이는 그중 셋째 부인 탄위링을 가장 사랑했으나 그녀는 입궁 5년 만에 22세로 급사했습니다. 2008년 푸이 황제의 유족들이 탄위링의 유골을 허베이성에 위치한 푸이의 능에 합장한다는 보도가 화제가 된 이유였지요.



비운으로 끝난 이승의 인연을 하늘나라에서라도 이어가길 원했나 봅니다. 망국의 황손들은 그 인생조차 국가의 운명과 궤를 같이하는 것인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세손 이구 선생의 여인은 세 명이었습니다. 지난달 별세한 유위진 진화랑 회장과, 마지막 황세손 이구 선생의 숨겨졌던 러브스토리를 j 가 처음으로 발굴해 공개합니다. 조국의 여인과 사랑을 나눴지만 이구 선생의 소통 수단은 일본어와 영어였습니다.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아버지 영친왕에게서 태어나 한국어조차 제대로 익힐 수 없었던 대한제국 황세손. 그에게서 인간적 연민과 함께 망국의 업보를 다시금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민초들의 불행과 삶의 유린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었겠죠. 한·일 강제병합 100년입니다. 사람의 행복과 그 공동체의 운명을 곰곰이 되새겨 봅니다.



최훈 중앙일보 j 에디터



1970년대 중반, 한 문화계 모임에서 다정하게 노래 부르고 있는 황세손 이구(왼쪽)와 유위진 회장. 1931년생 동갑내기에다 취향이 비슷해 말이 잘 통했던 두 사람은 연인으로 지낸 10년 동안 절절한 사랑을 나눴다.
“진, 사랑해 … 보고 싶지, 조금만 참자”

-이구 선생이 보낸 편지 중에서-




대한제국은 100년 전 사라진 나라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강제병합의 치욕을 안고 국호를 버렸다. 조선왕조 500년의 빛나는 역사가 하루아침에 무너진 이 땅에서 망국의 한을 품고 살았던 이들 중엔 황실 사람들도 있다. 마지막 황세손(皇世孫) 이구(李玖·1931~2005)도 그 중 하나다. 일제의 제국주의가 총칼을 휘두르며 목을 조이지 않았다면 그가 통치할 수도 있었던 국토와 백성을 유배지나 다름없는 타국에서 그리워할 수밖에 없었다. 망국의 역사를 참담한 심정으로 바라봤던 그에겐 잃어버린 나라를 대신한 정인(情人)이 있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할 수 있는 10년 세월을 그는 오롯이 그 연인에게 바쳤다. 20대에 했던 미국 여성과의 결혼 생활도, 부유한 일본 여성과의 말년 생활도 그에게 줄 수 없었던 행복을 선사한 그 애인이 한 달 전 타계했다. 두 사람의 죽음으로 이제야 세상에 공개할 수 있게 된 마지막 황세손의 사랑은 역사의 굴곡 속에 핀 한 떨기 국화처럼 애틋하다.



글=정재숙 선임기자 johanal@joongang.co.kr

사진 제공=진아트센터 



지난달 3일자 일간지의 사람란에 실린 부음기사 하나가 문화동네에서 화제가 됐다. 2일 오후 79세로 별세한 유위진(柳渭珍) 진화랑 회장이 그 주인공이다. 국내 화상(畵商) 1세대로 꼽히는 그의 죽음은 아쉬움을 남겼다. 며칠 전까지도 전시 도록을 챙겨 직접 신문사 문화부를 돌던 영원한 현역이기 때문이다.



진화랑, 선화랑, 미화랑의 화랑 이름 순서를 따라 한국 화랑가의 진(眞)으로 불리던 진화랑과 진아트센터를 40년 가까이 이끌어온 그였다. 동세대 화랑 여주인들이 대부분 남편과 경영을 함께 하거나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추세와 달리 그는 평생 홀로 살며 싹싹한 ‘미스 유’로 불렸다. 모자를 좋아하고 화려한 색 옷을 즐겨 입는 그에겐 젊은 친구가 많았다. 아가씨 뺨치는 센스와 감각, 소녀처럼 웃으며 다정하게 말을 거는 그 앞에서 나이를 묻는 건 실례였다.



#결혼 안 한 그에게 아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끈 대목은 부고에 나타난 가족사항이었다. 미혼이었던 그에게 아들 유재응(42·진화랑 전무)씨가 있는 것으로 밝혀져서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수군거렸다. 한때 소문으로 번졌던 황세손과의 사랑이 진짜였던 모양이라고. 숨겨둔 아들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추측은, 그러나 오해였다. 고인은 살아 있을 때 남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입적해 이미 후계자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화랑의 미래를 걱정하던 그에게 밑바닥 허드렛일부터 묵묵히 배워온 조카는 든든한 동지였다.



유위진 회장이 생전에 굳게 입을 다물고 목숨처럼 지켰던 사랑이야기를 털어놓은 것은 그를 친어머니처럼 모셨던 유재응씨였다. 삼일장을 모시고 화랑으로 돌아온 그는 “이제는 그분들의 러브스토리를 털어놓을 때가 됐다”고 했다. 가슴속에 담아두기에는 안타까운 역사적 그늘이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유 회장이 앞으로 마지막 황세손 이구의 ‘동거녀’로만 표현된다면 두 사람을 모욕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진실로 사랑했고, 역사의 아픔을 함께 나눴기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였다.



#운명 같은 황세손과의 만남



유위진 회장은 1931년 경남 양산의 유복한 집안에서 7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황세손 이구와는 동갑이다. 이화여대 음악학과에서 공부하며 시를 즐겨 쓰던 문학소녀였다. 1959년엔 한국전쟁을 주제로 한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다녀 일본어를 잘했고, 성격이 진취적인 신여성이었다.



여자도 자기 전문 분야를 가져야 한다는 일념으로 문화계 인사들과 교유하며 이런저런 모색을 하던 그에게 운명처럼 황세손이 나타난 때가 1970년 초였다. 50년대 미국 뉴욕 아이엠페이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던 황세손이 63년 부모인 영친왕, 이방자 여사와 함께 귀국해 7년여를 고국에서 보낸 뒤였다. 이미 서울대학교와 연세대 등에서 건축설계를 강의하던 황세손은 자신의 전공을 살려 ‘트랜스 아시아’라는 건축설계회사의 부사장을 지냈다.



유 회장의 막내 여동생인 유민정(70·진화랑 부사장)씨의 기억에 따르면 두 사람은 문화 관련 공식 모임에서 만났다고 한다. 한국어가 서툴던 황세손 이구는 일본어를 잘하는 유위진 회장과 말이 통하면서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됐다. 막상 대화를 시작하자 취향이 비슷한 걸 알게 된 두 사람은 운명처럼 서로에게 빠졌다. 마흔 살에 찾아온 사랑 앞에서 두 사람은 촌음을 아껴가며 서로를 그리워했다.



#몇 년 나눈 사랑의 편지가 수백 통



“언니가 골초였어요. 근데 이구 선생이 ‘담배를 끊을 것!’이라는 편지를 보내자 그 즉시 담뱃갑을 내다버렸다니까요. 매일 일기를 쓰던 언니 다이어리엔 이구 선생과 나눈 얘기가 빼곡해요.” 유민정씨 증언에 따르면 미술 관련 일을 하고 싶어 했던 유 회장에게 화랑업에 관한 조언을 해준 것도 황세손이었다. 70년대 초 당시, 한국보다 화랑업이 앞서 있던 미국과 일본의 선례를 알려주고 화랑 건물까지 설계해 줬던 이가 황세손 이구다. 72년 10월 1일, 서울 사간동 지금의 법련사가 서 있는 자리에서 문을 연 진화랑이 개관 초기부터 해외 작가들을 소개하는 굵직한 전시를 개최한 배경이다.



현재 통의동에 서 있는 진화랑 건물의 내부 설계와 보수공사를 한 이도 황세손이다. 1977년 사간동에서 통의동으로 이전하면서 기존 건물을 고쳐야 했던 유 회장은 연인의 손에 그 공사를 부탁했다. 단순하고 검박해 보이는 나무 천장의 실내에 들어가 서 있으면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설계도와 씨름하던 황세손이 보이는 것 같다. 79년 완공한 서울 청운동 자택을 설계한 이도 황세손이다. 두 사람의 사랑이 익어간 보금자리다. 그런 사랑의 추억 때문일까. 유 회장은 화랑이든 집이든 어느 구석 하나 고치는 걸 반대했다고 한다.



‘얼마 전 오랜만에 당신 꿈을 꾸었어요. 역시 당신도 나를 그리워하는구나 싶었어요. 사랑하면서도 서로 떨어져 모든 감정을 누르고 일에 열중하고 계시는 당신을 보면 무슨 일이 있어도 꾹 참고 방해하지 말아야겠다 싶어요….’



유 회장이 황세손에게 보낸 연서의 내용이다. 회사 일로 해외 출장이 잦았던 연인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보낸 편지가 수백 통이 넘게 남아 있다. 유 회장은 곰살곰살한 글씨로, 황세손은 황족다운 장중한 서체로 종이 위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진, 사랑해. 진보다 내가 더 보고 싶어 하는 걸 모르고선… 보고 싶지. 조금만 참자.’



이구의 어머니인 이방자 여사(왼쪽)가 유 회장과 함께 찍은 사진. 이 여사는 한복 맵시가 좋은 유 회장을 ‘진이야’라고 부르며 모임에 동반하기도 했다.
#10년 만에 끝난 사랑



황세손 이구는 유 회장을 진 또는 진사마라 불렀다. 황세손의 어머니인 이방자(1901~89) 여사도 유 회장을 예뻐했다고 한다. 사회봉사활동을 많이 한 이 여사는 ‘진이야, 진아’라고 부르며 각종 모임에 유 회장을 대동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유 회장 역시 이 여사를 시어머니 대하듯 깍듯하게 모셨다고 한다. 장애인을 위한 명휘원의 운영자금을 모으기 위해 열던 각종 바자나 전시회에 유 회장이 큰 힘을 보태기도 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왜 결혼하지 않았을까. 물론 황세손 이구는 미국 체류 시절에 이미 여덟 살 연상의 독일계 미국 여성 줄리아와 결혼했지만 법적인 이혼 절차는 밟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던 와중에 사업에 실패한 황세손이 이방자 여사의 부름에 급작스럽게 일본으로 돌아간 뒤 소식이 끊기게 된다. 돈 많은 일본 여성과 산다는 소식이 들려왔지만 유 회장은 믿지 않았다. 편지 한 줄, 전화 한 통 없는 황세손을 애타게 기다리던 유 회장은 몇 차례 도쿄로 찾아갔지만 그를 만나지 못했다. 수십 년 언니를 곁에서 지켜본 여동생 유민정씨는 “얼마나 그리웠으면 보고 싶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고 비망록에 썼으면서도 우리 앞에선 내색 한 번 안 했고 눈물 한 방울 안 비쳤다”고 회고했다. ‘그는 돌아온다, 돌아온다’고 주문처럼 말했다는 것이다. 유민정씨는 이와 관련, "이방자 여사가 경제적인 이유로 이구 선생을 일본으로 불러들여 일본인 부자 여성과 만나게 한 뒤 언니와는 소식이 끊긴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사랑은 이승과 저승도 뛰어넘는 것일까. 유 회장은 돌아가기 20일 전쯤 가족들에게 “이 선생이 나타나 ‘오라, 오라고’ 하며 자꾸 손을 내밀었다”며 “내가 죽을 뻔했다”고 말하면서도 기쁜 얼굴을 했다고 한다. 유재응 전무는 “뒤에 남아 두 분의 사랑을 기리는 우리들은 이구 선생이 어머니를 데려갔다고 믿는다.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만나 이승에서 못다 한 사랑을 나누고 계실 것”이라고 말했다.



애절한 기다림과 고독으로 끝난 마지막 황세손의 사랑은 한국 근현대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비련의 풍경화였다.






j 칵테일>>



영친왕의 아들, 황세손 이구의 일생




일본에서 사단장을 지내던 시절의 영친왕(왼쪽 첫째)과 아들 이구, 영친왕 부인 이방자 여사. [중앙포토]
1931년 일본 국적의 황세손으로 출생



이구는 1931년 12월 29일 일본 도쿄 지요다(千代田)구의 아카사카(赤坂)에 있던 저택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본에 사실상 볼모로 왔던 고종의 아들인 영친왕 이은(李垠)이었고, 어머니는 일본 왕족 나시모토 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의 딸 나시모토 마사코(梨本方子·한국명 이방자)였다. 조선 왕실의 대를 끊기 위해 아이를 못낳는 것으로 알려진 마사코와 결합시킨 정략 결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첫 아들 이진을 낳았고, 그가 출생 10개월 만인 22년 숨지면서 이구가 황세손이 됐다.



이구와 그의 부인 줄리아 멀록이 1974년 서울 창덕궁의 낙선재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중앙포토]
1956년 명문 MIT 건축과 입학



그는 1950년 도쿄의 가큐슈인(學習院) 고등과에 다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점령군인 미국 맥아더 장군의 주선으로 56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건축과에 입학했다.



1959년 미국인 여성과 결혼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의 건축사무소에서 일하던 이구는 1957년 회사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8세 연상인 독일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 둘은 59년 결혼했다. 그는 63년 부모와 서울로 돌아와 창덕궁 낙선재에서 살았다. 서울대·연세대에서 강의를 했고 건축설계회사 부사장도 지냈다.



이구와 유위진은 다정하게 함께한 여러 장의 사진을 남겼다. 왼쪽 사진은 한 미술 전시회의 작품 앞에 선 두 사람. [진아트센터]
1970년 초 운명적 만남



대학 강의와 건축 설계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는 1970년 초 문화계의 한 공식 모임에서 유위진을 우연히 만났다. 두 사람은 수백 통의 연서를 나누며 사랑을 키웠지만 이구가 어머니의 부름에 갑자기 일본으로 돌아간 뒤 연락이 끊긴 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2005년 도쿄에서 타계



2005년 7월 24일 이구의 영결식이 열렸다. 서울 창덕궁 희정당 앞에서 영결식을 마친 이구의 유해는 노제를 거쳐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영친왕 묘역인 영원(英園)에 안장됐다. [중앙포토]
그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총재에 추대된 1973년 신한항업이란 회사를 세웠지만 실패하고 79년 다시 일본으로 갔다. 82년엔 아이를 낳지 못했던 멀록과 이혼한 뒤 96년 11월 영구 귀국했으나, 다시 일본으로 갔고 2005년 7월 16일 자신이 ‘태어났던 터’인 도쿄의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 투숙했다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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