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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2-1

중앙일보 2010.09.04 00:06 주말섹션 10면 지면보기
히틀러와 스탈린이 폴란드를 나누어 점령했을 때 폴란드 동부의 삼림지대에서 벌어진 이른바 ‘카틴 학살’은 이듬해 폴란드 전토를 차지한 독일 군부가 그것이 소련군의 소행임을 밝히며 전 세계를 상대로 선전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카틴 학살의 풍문은 이미 그 전에도 폴란드뿐만 아니라 여러 세기 연방으로서 폴란드와 운명을 같이해온 리투아니아의 구석구석까지 음산한 겨울 안개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특히 리투아니아 지식인이나 전문가 층으로서 폴란드 장교로 징집될 예정이었던 사람들은 언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도 수시로 가위눌림에서 깨나야 할 만큼 그 일을 소름 끼쳐 했다.


“무슨 일이 나면 … 이 나라를 떠나시오”

리투아니아-폴란드 연방 시절에 폴란드화한 리투아니아 옛 영주계급의 후예인 비타우타스도 독일과 소련이 개전하기 전에는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 일대를 점령하고 있던 폴란드군의 장교로 징집될 예정이었다. 조부까지 내려왔다는 백작의 작위도 옛일이 되고, 빌뉴스 근처에 작은 영지(領地)와 허물어지다만 고성(古城)이 전부인 비타우타스는 그때 아내와 세 딸을 둔 서른 한 살의 고등학교 물리교사였다. 15세기 리투아니아 영토를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확장했던 대공(大公)에게서 따온 이름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나, 그래도 어쨌든 그는 신생 독립국 폴란드가 의지해야 할 지식인 계층에 속했고, 당장은 침입해 오는 소련군에 맞설 폴란드군의 장교로 쓰이게 되어 있었다.



비타우타스가 폴란드의 운명에 얽매여 있는 조국 리투아니아를 떠나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마도 카틴 숲에서의 학살 풍문을 들은 뒤였을 것이다. 볼셰비키 소련이 그토록 모질게 폴란드 장교들과 지식인을 처형한 것은 폴란드 독립의 의지와 능력을 말살하기 위함이었으며,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 믿고 불안하게 여기던 그는 비슷한 처지의 친구 몇 명과 미국으로의 이주를 꿈꾸었다. 실제로 그 무렵 적지 않은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가 소련 당국에 의해 시베리아로 끌려가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미처 실행에 들어가기도 전에 다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히틀러가 보낸 독일군에 점령되고, 멀리 외국으로 이주한다는 그의 계획은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



폴란드를 모두 점령한 그들 독일군은 어떻게 알았는지 소련군에 의한 카틴 숲의 학살을 들춰내 전 세계에 대고 소리 높이 소련을 비난했다. 그것이 마치 세상에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는 다짐처럼 들리며, 거의 강박의 수준에 이르렀던 비타우타스의 공포에 진정의 효과를 냈다. 그러자 작은 농장 정도밖에 안 되는 영지와 이미 폐허에 가까운 고성도 새삼스러운 애착으로 그를 붙잡았다. 그래서 어물어물하는 사이 두 해가 지나고 어느 날 홍수가 차오르듯 다시 소련군이 독일군을 몰아내고 리투아니아로 들어왔다.



그제야 놀란 비타우타스는 이주 계획을 다시 서둘렀으나 스탈린이 보낸 군대와 비밀경찰이 더 빨랐다. 폴란드에서만큼은 아니더라도, 리투아니아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데 장애가 될 만한 지도층 인사가 하나 둘 자취를 감추더니, 어느 날 밤 비타우타스도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런데 그 무슨 예감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체포되기 전날 밤 비타우타스는 젊은 아내에게 가만히 당부했다.



“아무래도 나는 기회를 놓친 것 같소. 카틴 숲의 일 때문인지 폴란드는 전보다 더 엄하게 단속되고, 발트해 쪽도 소비에트 군함들로 콱 막혔소. 우리 다섯 가족이 함께 이 나라를 빠져나가기는 이제 틀린 듯하오. 잘 들으시오.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당신이라도 아이들과 함께 이 나라를 떠나 멀리 달아나시오.”



그 말에 놀란 그의 아내가 눈물을 쏟으며 받았다.



“당신도 없이 우리만 가서 무엇 하겠어요? 그렇게 되면 오히려 여기 남아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야지요.”



“당신은 카틴 숲의 일을 모르시오? 거기서 처형당한 것은 폴란드 장교들만이 아니오. 그들을 찾아 나선 가족들도 학살당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군의 침공이 늦었으면 나머지 가족들까지 처분할 계획이 있었다는 말도 있소. 내가 끌려가면 당신들은 반드시 멀리 피해야 하오. 당신들 넷이 모두 함께 떠날 수 없으면 떠날 수 있는 만큼이라도 떠나 어떻게든 반드시 살아남아야 하오.”



“싫어요. 저 어린 것들하고 떠난들 어디로 가며, 가서는 또 어떻게 살아간단 말이에요?”



“미국으로 가시오. 그곳은 모두에게 기회의 땅이라 하지 않소? 진작 이 나라를 떠나 미국으로 간 친구 중에는 벌써 그곳 시카고에서 자리 잡은 이들도 있다 하니 그리로 가 보시오. 특히 스메타나를 찾아가면 모르는 체하지는 않을 것이오. 거, 왜, 내 어릴 적부터의 친구 스메타나 말이오. 대학 동창이기도 하고… 빌뉴스 상의 회장까지 지낸 그의 아버지만큼은 안 되어도, 그곳 시장에서 제법 그럴듯한 점포까지 열었다고 하오.”



그러고는 윗대로부터 물려받은 자신의 봉인(封印) 반지까지 뽑아 채운 귀금속 주머니와 소련군표를 비롯해 몇 가지 북유럽에서 유통 가능성이 있는 인접국 화폐 한 묶음을 내놓았다. 모두 국외로 이주할 준비를 하면서부터 모아온 것들인 듯했다.



자신의 예감대로 비타우타스는 이튿날 밤 급조된 리투아니아 소비에트 당원들에게 끌려간 뒤로 다시는 아내와 가족들에게로 돌아오지 못했다. 1945년 초봄의 일이었다.



비타우타스의 젊은 아내는 남편의 간곡한 당부도 접어두고 그날부터 있는 힘을 다해 남편의 행방을 좇았다. 그러나 보름이나 빌뉴스의 구석구석을 뒤지며 알아보아도 남편이 간 곳을 알 길이 없었다. 40년 초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시베리아로 끌려갔다는 소문부터 어딘가 또 다른 카틴 숲에서 원통한 죽음을 당했을 거란 불길한 추측까지 모두가 하나같이 넋이 흩어지고 애간장이 녹을 소리들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동쪽과 서쪽에서 독일로 다가들던 전선은 마침내 베를린에서 만나고 참혹한 대전은 끝이 났다. 이제 붉은 군대로 불리게 된 러시아군은 예전처럼 자신의 땅으로 돌아가거나 폴란드 일부를 분할해 점령하는 정도로 전쟁을 마감하지 않고, 동유럽 곳곳에 주둔해 미국과 더불어 유럽을 반분했다. 그 유례없이 강대한 두 세력의 대치와 고착의 기미가 문득 비타우타스의 젊은 아내를 깨우쳤다.



‘남편이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서둘러 빠져나가야 할 차례다. 더 늦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저들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저들의 지배 아래 있는 이 리투아니아는 우리에게 죽음의 땅이나 다름없다.’



그런 깨달음에 소스라친 비타우타스의 젊은 아내는 그날로 떠날 채비를 하고 밤이 깊기를 기다려 몰래 빌뉴스를 떠났다. 그러나 그녀가 폴란드의 국경도시로 떠나는 기차에 오를 때 함께 데리고 간 것은 세 딸 중 가운데인 여섯 살배기 일리야뿐이었다. 아홉 살배기 맏딸 에레나와 세 살배기 막내 올가는 약간의 귀금속과 함께 오래 영지를 지켜온 늙은 부부에게 맡겨졌다.



혜련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은 것은 내가 부산에서의 연출 활동을 접고 서울로 올라온 그해 겨울이었다. 학사 편입을 한 격인 혜련이 다시 석사과정으로 들어간 해이니 그녀가 부산에서 떠난 지는 3년쯤 지난 뒤였다. 지방 무대의 척박함에 지쳐 무턱대고 서울로 올라온 내가 대학로에 짐을 부린 지 얼마 안 되는 어느 날 우연히 거리 카페에서 혜련을 만났다. 벌써 세 번째로 반복되는 만남이라 그런지, 헤어진 뒤로 그리 절실하게 그리워해 본 적도 없는 사이였지만 반갑기 짝이 없었다. 혜련도 반가워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이내 함께 들어온 일행과 작별하고 내 자리로 옮겨왔다. 그런데 서로의 근황과 아는 사람의 안부를 묻는 절차가 끝나기 바쁘게 혜련이 그 얘기를 꺼냈다.



“지금 외가 쪽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그럼 그 일리야란 여섯 살배기가 바로 어머니가 되는 거야?”



“그래요.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큰이모 에레나와 막내이모 올가 얘기예요.”



“그런데 우리 3년 만에 만나는데, 그 얘기가 만나자마자 할 얘기냐?”



나는 재미있게 들었으면서도 난데없다는 기분을 떨쳐내지 못하고 그렇게 솔직히 물었다. 혜련이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는 듯 받았다.



“그때 부산에서 단원들과 송별회 하던 밤에 궁금해 하셨잖아요. 마지막 화제였으니까 이렇게 만난 김에 잇는 거죠. 뭐.”



그러고 보니 그게 모든 일에 실용적인 그녀의 어법이기도 했다. 나도 더 따지지 않고 그때까지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생긴 궁금증부터 털어놓았다.



“그런데 외할머니는 어째서 세 딸을 다 데리고 가지 않았지?”



“아마 그 당시 형편이 셋을 다 데리고는 리투아니아를 벗어날 수 없어서였을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미국 가는 배를 탄 것이 암스테르담이었다니,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폴란드와 독일을 가로질러 수천 킬로미터를 갓 서른인 젊은 여자가 세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헤쳐갈 수 있었겠어요? 폴란드뿐만 아니라 동독을 가로지를 때도 줄곧 걸었다는데요.”



“그렇다고 해도 왜 하필 여섯 살배기 가운데 아이야? 잘 걷는 아이로 고른다면 아홉 살배기가 나을 거고, 어린 게 불쌍하다면 세 살배기를 데려 갔어야지.”



나는 정말로 궁금해 혜련이 그녀의 외할머니나 되는 듯 다그쳐 물었다. 혜련이 갑자기 쿡쿡 웃으며 대답했다.



“그건 나도 모르죠. 아니 그렇게 선택한 외할머니도 모르시는 것 같았어요.”



“물어봤어?”



“아뇨. 저는 아니고. 한 10년 전에 에레나 이모와 올가 이모가 외할머니를 찾아와 그걸 따진 적이 있는데, 외할머니는 도통 대답을 못하시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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