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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낙동강 일대 ‘자전거로 600리’ 달린 스티븐스 주한 미대사

중앙일보 2010.09.04 00:05 주말섹션 5면 지면보기
1일 오전 9시15분. 경남 창녕군 영산면 영산호국공원 앞에 경찰차의 호위를 받으며 성조기를 단 외교차량 행렬이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인구 6400명의 소박한 시골마을에선 좀체 볼 수 없던 광경이다. 공원 앞에서 들뜬 표정으로 줄지어 서 있던 면사무소 직원들과 대표자들은 “오셨다!”고 이구동성 외쳤다. 성조기를 단 방탄 캐딜락의 문이 열리고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가 내렸다.


자전거 외교 250km … “심은경씨, 사람 참말로 멋있네”

창녕·달성=전수진 기자 sujiney@joongang.co.kr

사진=송봉근 기자 bksong@joongang.co.kr



“역대 대사가 가보지 않은 곳 직접 방문해 사람들 만나고 싶었죠”



스티븐스 대사가 입고 있던 초록색 상의엔 ‘심은경 대사와 함께하는 자전거 600리’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스티븐스 대사는 영산호국공원 기념비에 헌화한 뒤, 준비해 온 자신의 자전거에 올랐다. 스티븐스 대사 일행은 지난달 29일부터 2일까지 꼬박 5일간 낙동강 일대 약 250㎞를 자전거로 주파했다.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기념해 스티븐스 대사가 주축이 돼 마련한 주한 미국대사관의 행사로, 매일 10명의 대학생이 동행했다. 대학생들은 사전 공모를 통해 3대 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됐다. 주한 미대사관 직원들도 함께했다. 공보과 직원들은 물론이고 대사관 담당 의사, 차량 담당 기능직 직원들도 한데 어우러졌다.



스티븐스 대사는 이들을 격려하며 국도를 자전거로 달리고, 주민들의 환영에 미소로 답했다. 쉴 때는 수박 한 쪽과 ‘쭈쭈바’로 열기를 식혔다(오른쪽 아래 사진). 그는 “주한 미국대사가 지금까지 가보지 않은 곳을 가고 만나보지 못한 분들을 만나고 싶었다”고 말했다. 심은경, 아니 스티븐스 대사의 ‘자전거 외교’ 현장을 밀착 취재했다.



29일 전남 여수에서 시작한 일정은 남해·사천·진주·함안·의령을 거쳐 2일엔 경남 창녕, 달성군, 대구시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스티븐스 대사는 인터뷰엔 영어로 응했지만 행사 내내 한국어를 우선으로 구사했다. 자기의 뜻을 완벽하게 한국어로 전할 수 없을 것 같은 경우에만 상대방에게 양해를 구하고 영어를 썼다. 인사말을 하면서는 “역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한국말이 맞다”고 얘기해 좌중의 박수를 자아냈다. 2일 일정을 마무리하고 소주·맥주를 곁들여 삼계탕을 저녁으로 먹는 자리에서도 대사관 미국인 직원들은 되도록 한국어를 쓰려고 노력했다. 온 몸과 온 마음으로 한국·한국인에게 파고들려는 노력이 묻어났다.



미대사관 관계자들은 “여러 대사님을 모셨지만 스티븐스 대사가 오신 후엔 새롭고 흥미로운 일이 많다”며 “오늘 행사가 참 좋은 예”라고 입을 모았다. 스티븐스 대사는 “오늘 행사에 집중하고 싶다”며 산적한 현안에 대한 의견 피력은 피했지만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다양한 일정을 소화하며 주한 미국대사로서의 모범을 보여줬다. 2일 경남 창녕과 대구시 달성군은 태풍 ‘곤파스’ 북상 소식에도 불구하고 햇빛이 쨍쨍했다. 다들 땀이 비 오듯 했지만 스티븐스 대사의 ‘영도’ 하에 무사고로 행사를 마쳤다. 다음은 스티븐스 대사와 틈틈이 나눈 대화다.



● 가는 곳마다 대단한 환대를 받았다. 스타 대사임이 증명됐는데.



“감사하게도 모두들 따뜻하게 맞아주셨다. 영광이기도 하지만 더 잘해야겠다는 책임감도 느꼈다. 미국대사로서 한국에서 나는 눈에 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환대해 주신 건 내가 미국을 대표하는 대사이기 때문이지, 나 개인이 특별해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여러 분이 한·미 관계를 소중히 여기신다는 걸 직접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한국어를 조금 구사할 수 있는 것도 잘 봐주신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주한 미국대사 직은 여러모로 수행하기가 어려운 자리인데.



“한·미 관계를 잘 이끌어 가는 건 자전거를 타는 것과도 비슷하다. 자전거를 잘 타기 위해선 일단 계속 페달을 밟는 게 중요하다. 멈추면 넘어진다. 때로는 길이 험할 수도 있다.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있다. 우리는 매우 길고 복잡한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에 대해 더 깊고 더 넓게 이해한다면 멋진 자전거 여행처럼 멋진 관계를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난 한국의 미래와 한·미 관계의 미래가 모두 밝다고 확신한다.”



● 주한 미국대사 임기는 3년이고 대사께서는 2008년 9월 부임했으니 이제 1년 남았는데 .



“벌써부터 내가 곧 떠날 것처럼 말하면 섭섭한데(웃음).”



● 임기가 1년 남았다는 걸 알고 오늘 많은 분이 “대사님이 계속 계셨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감사한 말씀이다. 대사직을 다시 수행할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도 다른 형태로 한·미 관계에 기여할 방법이 많을 거라고 기대한다.”



대학생들과 여수 ~ 대구 5일간 주파 … 한국 전쟁 전적지도 찾아다녀



● 이번 행사는 요즘 한창 화두인 ‘공공외교’의 모범 사례인 것 같다. 기획 계기는.



“나는 이번 행사를 ‘자전거 외교(bike diplomacy)’라고 부르고 싶다. 특별히 어떤 목적을 갖고 기획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한국 곳곳에 계신 한국인 여러분들을 찾아뵙고 싶다는 생각으로 마련했다. 미국대사들이 만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 방문한 적이 없었던 곳을 찾아다니고 싶었다. 많은 군수님, 교장선생님들, 학생들을 만나면서 그들이 갖고 있는 풍부한 이야기 보따리를 듣는 건 매우 큰 즐거움을 선사했다. 이방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은 ‘세 살 때 어머니가 나를 등에 업고 피란을 갔다’며 생생한 6·25전쟁 얘기를 들려줬다.”



● 자전거 여행을 택한 이유는.



“나를 포함한 많은 미대사관 직원이 자전거 매니어다. 그래서 자전거에 대한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자전거 여행을 기획하게 됐다. 또 올해가 마침 6·25전쟁 발발 60주년이지 않나. 낙동강 지역은 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전적지가 많다. 그래서 한국의 젊은이들과 함께 자전거로 전적지를 다니며 희생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역사를 배우는 기회로 삼았다. 게다가 자전거를 이용하니 매연도 발생하지 않아 환경에도 좋다. 오늘 방문한 우포늪 역시 환경적으로 중요한 곳이라 환경친화적 여행의 의미도 살릴 수 있었다.”



● 본인은 6·25전쟁에 얽힌 기억이 있나.



“삼촌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다. 하지만 삼촌에게 6·25전쟁에 관한 얘기를 많이 듣지는 못했다. 책을 읽고 오늘과 같은 여행을 통해 많은 걸 배우고 있다. 오늘 아침 방문했던 영산호국공원은 미군과 한국군이 함께 싸운 곳이라 더 의미가 깊었다. 안내해 주신 분이 ‘저기 나무에 북한군 시체가 걸려 있었다’는 식의 생생한 설명도 들을 수 있었다. 영산호국공원에 미군 기념비를 세워주신 것도 봤다. 한국분들에게 감사드린다.”



● 오늘 행사에 참가한 어떤 대학생은 “주미 한국대사관에서도 이런 행사를 열면 좋겠다”고 제안하던데.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결정하실 일이긴 하지만, 만약 하신다면 매우 뜻깊은 행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워싱턴DC에도 6·25전쟁 참전용사를 기리는 한국전쟁기념비와 알링턴 국립묘지 등 의미 있는 곳이 많고, 자전거를 타기에도 좋은 환경이다.”



● 오늘과 같은 행사를 이어나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일단 이번 행사가 끝나고 몇 달 후 참가 학생들과 함께 다시 모여 6·25전쟁 관련 세미나를 하면 의미가 있을 듯하다. 그리고 이런 여행 프로그램이 좀 더 다방면으로 활성화되면 좋겠다. 한국엔 우리들이 잘 모르는 소중한 역사적 장소가 참 많은 것 같다. 오늘 중간에 들른 광산서당에서도 한국인의 수백 년 된 교육열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에 관광객들을 더 유치하려면 이런 면을 좀 더 부각시키면 어떨까 조심스럽게 제안을 드린다.”



행사를 진행하면서 한국 대학생들은 “미국대사관에서 이런 행사를 하다니 우리가 부끄럽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최원석(27·성균관대 중문과)씨는 “오늘 다닌 영산호국공원과 같은 전적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다. 미국에서 먼저 우리의 역사를 일깨워준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지만 이런 행사를 통해 오늘이나마 알게 돼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전세영(23·영남대 사회학과)씨는 “미국에 대한 감정이 좋아지는 계기가 됐다”며 “보통 대사님들 이미지는 정장에 운전기사 딸린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건데 스티븐스 대사님은 사서 고생을 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다”라고 말했다. 창녕 이방초등학교 김석연(60) 교장은 “아이들이 대사님이 오신 걸 보고 아주 감격했다”며 “우리 역사를 외국 사람들이 먼저 몸소 체험하고 다니는 게 대단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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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곳마다 환대 …“미국대사가 애쓰는 모습 인상적”




스티븐스 대사는 원래 1일 오전 9시 정각에 경남 창녕군 영산면 영산호국공원에 나타나기로 돼 있었다. 그러나 9시5분쯤 미대사관 공보과에서 전화가 왔다. “옆마을 이장님이 오셔서 ‘우리 마을 사람들이 대사님을 꼭 한번 뵙고 싶다’며 새벽부터 기다려서 잠깐 그 곳에 들르셨다. 좀 늦을테니 양해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렇듯 어딜 가나 스티븐스 대사는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는 요청과 사인 요청 공세를 받았다. 영산면사무소에 근무하는 안선영(31)씨는 사인을 받고 “오늘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 손꼽아 기다렸다”며 “같은 여성으로서 심은경 대사님이 자랑스럽다”고 말하며 얼굴이 빨개졌다. 영산호국공원을 안내한 문화해설사 성창식(61)씨는 행사를 마치고 “심은경 만세 삼창을 외치자”고 제의했고 모두들 ‘심은경’이란 이름을 외쳤다. 스티븐스 대사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지치는 기색 없이 항상 미소를 지었다. 영산면에서 수퍼마켓을 운영하는 노영호(70)할머니는 스티븐스 대사가 아이스크림 값을 치른 직후 “내 생전에 미국대사를 직접 볼줄은 상상도 못했제. 사람 참말로 멋있네”라며 즐거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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