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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상생, 할 말 많습니다 … 아직 멀었어요”

중앙일보 2010.09.02 03:00 경제 1면 지면보기
휴대전화용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서오텔레콤의 김성수(58) 대표는 최근 미국계 기술평가 회사인 인비즈커넥트와 제휴했다. 이 회사가 개발한 휴대전화용 응급호출 시스템을 글로벌 대기업에 판매하고, 수익의 일부를 받는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김 대표는 이 시스템에 대해 일찌감치 국내 한 대기업과 제휴를 모색했다. 그러나 해당 대기업이 몇 년 뒤 따로 유사한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이 대기업과 7년째 특허 분쟁을 하고 있다. 김 대표는 “이런 와중에 세계적인 기업에서 우리 기술을 인정해준 것”이라며 외국계 업체와의 제휴에 의미를 부여했다. 한편으론 중소기업 기술 탈취 문제를 거론하며 “한국 대기업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는데 어떻게 (한국 업체와) 거래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중소기업 CEO 3인 인터뷰 … 기술 뺏고 납품가 묶고 어음 여전



이명박 대통령의 친서민·친중소기업 행보 이후 대·중소기업 간 상생협력이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LG·포스코 등 대기업들이 중소기업과의 상생방안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그러나 대기업의 노력이 결실을 맺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중소기업계는 “아직 멀었다”는 반응이다. 중소기업기술정보진흥원 관계자는 “지난 5월 이후 하루 두세 건씩 기술 유출 사례가 신고되고 있다”며 “대부분은 중소기업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상당히 근거가 있는 내용”이라고 말했다.



볼트·너트 등 기초산업부품을 유통하는 한국화스너의 김덕한(58) 사장은 1년여 동안 거래하던 대기업에서 최근 ‘거래 중단’ 통보를 받았다. 김 사장은 “주요 원자재 값이 2년 새 70% 이상 올랐지만 단 한 차례도 단가 인상이 없었다”며 “결국 계약 연장을 포기해야 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납품단가 구조를 정상화하려면 대기업의 오너 경영인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기업들의 융통어음을 받았다가 피해를 보는 사례도 여전하다. 부엌가구 부품업체인 가우테크의 성양제(55) 대표는 최근 20억원대 어음 부도로 회사가 휘청하는 아픔을 겪었다. 성 대표는 “이 문제 때문에 회사보다 변호사 사무실로 출근하는 날이 더 많다”며 “ 어음 때문에 고생하는 중소기업이 많다”고 하소연했다.



이상재 기자






“대기업 열심히 돕는다지만 … 온도차는 여전해요”



이명박 대통령이 7월 22일 서울 화곡동에 있는 미소금융재단을 찾은 이후 ‘친서민·친중소기업’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이후 한나라당 대표와 국무총리, 관계부처 장관이 중소기업 현장을 방문하는 등 대·중소기업 간 상생협력이 이슈로 떠올랐다. 그러자 최근 한 달 새 삼성전자·현대자동차·LG·포스코·롯데 등 대기업들이 앞다퉈 대·중소기업 상생방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중소기업들과는 여전히 온도 차이가 있다. 중소기업중앙회 김기문 회장은 “요즘 대기업이 발표하고 있는 상생방안을 살펴보면 70점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대기업들의 납품단가 조정, 기술·노하우 탈취, 부도어음 피해가 여전해서다.



#부도 어음에 떠는 중소기업



싱크대 상판을 주로 만드는 가우테크는 1990년 창업한 이래 한 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는 탄탄한 중소기업이다. 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매출이 늘었다. 그런데 이 회사 성양제(55) 대표는 최근 극심한 스트레스 증세로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올 2월 받은 어음이 부도난 것이 문제였다. 가우테크는 수년간 거래하던 기업 두 곳이 부도나면서 20억원대의 손해를 입었다. 성 대표는 “두 곳 모두 지난해 말 산업훈장까지 받았던 건실한 회사였다”며 “지난해 말부터 갑자기 종잇장 남발하듯 융통어음을 돌리더니 부도를 냈다”고 말했다.



성 대표는 현재 비슷한 처지의 중소기업 관계자들과 대책위원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앞날이 막막하기만 하다. “법원에 ‘정황상 고의 부도’라고 호소했지만 소용없었다. 우리는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몇몇 자금사정이 취약한 업체는 연쇄부도 위기에 몰려 있다. 법정 공방을 벌이고는 있지만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게 더 상황을 어렵게 하고 있다.”



거래 업체에 대한 대기업들의 현금결제 비중이 높아지고 있지만, 아직 사각지대가 많다는 얘기다. 성 대표는 “특히 최근 부동산 경기가 위축되면서 건설회사들이 융통어음을 발행해 중소기업에 부담을 주고 있다”고 주장했다. 융통어음은 발행 업체가 일시적인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제 상거래 없이 발행하는 어음이다. 부도가 나면 이 어음을 받은 협력업체가 고스란히 피해를 보게 된다. 성 대표는 “거래 대기업들이 융통어음으로 결제하겠다고 해도 거절할 방법이 없다”며 “부실 위험이 있는 대기업의 융통어음을 받는 순간 지뢰를 밟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실한 어음제도 때문에 멀쩡한 중소기업이 피해 보는 일은 막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2월 전국은행연합회와 은행권은 어음 남발로 인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어음제도를 대폭 손질했다. 발행금액 1000만원 이상의 어음에 대해 등록제를 시행하고 일정 신용등급 이상인 경우에만 어음 발행을 허용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그러나 한국은행에 따르면 그 이후에도 어음 부도율은 별로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부도 어음 때문에 피해 보는 업체 대부분은 중소기업”이라며 “대기업은 수년에 한 번 나오는 정도”라고 말했다.



#납품단가의 벽에 막힌 7년 공든 탑



경기도 평택에 있는 한국화스너는 볼트·너트 같은 기초부품을 유통하는 중소기업이다. 이 회사 김덕한(58) 사장은 공급자관리창고(VMI) 시스템을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소규모 볼트·너트 업체는 생산에 전념하고 한국화스너가 유통과 창고 관리를 맡는 형태다. 이 회사가 개발한 ‘전자저울’ 정보기술 시스템을 통해 제조업체에 자동으로 발주된다. 외국계 부품유통기업 출신인 김 사장은 국내 업체가 관련 사업을 주도해야 한다는 소신에서 지난 7년간 30억원을 투자해 이 시스템을 구축했다. 김 사장은 “부품을 구매하는 입장에서는 재고 걱정을 덜고, 부품업체는 생산에만 몰두할 수 있어 서로 이익”이라고 설명했다.



선진적인 부품공급 시스템을 갖췄다고 자부하지만 김 사장도 ‘납품단가의 장벽’을 넘지 못했다. 한국화스너는 2주 전 1년간 거래하던 A사로부터 ‘8월 말로 거래를 종료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김 사장은 그동안 그 회사와 주고받았던 e-메일과 관련 서류를 기자에게 보여주면서 “지난 5개월간 납품단가 인상을 요청했으나 결국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볼트·너트 업체의 주요 원자재인 선재 값이 2년 새 70% 넘게 올랐으나 A사는 단 한 번도 납품단가를 올리지 않았다. 구매 담당자가 구두로만 (단가 인상을) 약속했으나 그뿐이었다. 구매 담당 직원이 단가 인상을 결정하기엔 한계가 분명히 있었다.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할 상황이어서 계약 연장을 스스로 포기해야 했다.”



김 사장은 “대기업에 VMI 시스템을 소개하기 위해 지난 1년간 1억여원의 적자를 감수해야 했다”며 “납품단가 인상은 대기업 오너 경영인이 나서야 풀릴 수 있는 문제”라고 주장했다. “현재의 대기업 인사고과 방식에서는 중소기업을 압박해 단가를 낮추는 구매 담당자가 높은 평가를 받게 돼 있다. 이런 구조에서는 대·중소기업 상생이 될 수 없다. 중소기업과 협업을 통해 기업 전체의 비용을 줄인 직원에게 승진 기회를 주고 성과급도 올려줘야 한다. 그러려면 오너의 경영마인드, 기업의 경영관리 시스템이 통째로 바뀌어야 한다.”



이에 대해 A사 관계자는 “지난 1년간 VMI 시스템을 도입해 나름대로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었다”면서도 “원가 압박을 구매 기업에 돌리는 것은 감당하기 어렵다. 부품조달 방법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화스너는 인수인계와 정산 절차가 마무리되는 다음 달 초 A사에서 철수한다. 



#한국 대기업 못 믿겠다… 결국 외국행





서오텔레콤 김성수(58) 대표는 대기업과 7년간 법정 분쟁을 벌인 ‘고집스러운’ 중소기업인으로 유명하다. 시가 50억원대 회사 건물까지 팔아가면서 LG텔레콤(현 LG유플러스)과 정면으로 맞선 것이 화제가 됐다. 중소기업은 감당하기 힘든 소송비용, 지루한 시간끌기 같은 문제 때문에 대기업과의 법적 분쟁을 기피하게 마련이다.



이 회사는 2001년 응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버튼 하나만 누르면 즉시 지정된 수신자에게 응급구조 메시지가 전달되는 기술을 개발해 특허를 받았다. 이후 LG텔레콤에 이동통신망을 이용한 비상호출 사업을 제의했으나 LG 측으로부터 ‘너무 앞선 기술’이라며 일단 기다려 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던 2004년 유영철 연쇄살인사건이 발생하자 LG텔레콤이 서오텔레콤의 기술과 유사한 통신 서비스를 시작했다. 곧바로 김 대표는 특허유효성 소송을 냈고, 2007년 최종 승소했다. 손해배상 청구 소송은 현재 진행 중이다.



결국 이 회사가 개발한 비상호출 서비스 기술은 외국계 정보기업(IT)이 채택하게 됐다. 김 대표는 7월 말 미국계 기술평가회사인 ‘인비즈커넥트’와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김 대표는 “H사와 M사 같은 굴지의 글로벌 기업에 우리 기술을 팔아주는 조건으로 판매가격의 20~40%를 받기로 했다”며 “늦어도 이달 말께 이들 기업과 정식계약을 맺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인비즈커넥트 나이젤 베이커 부사장은 “서오텔레콤이 개발한 응급호출 시스템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세계적인 기업과 거래할 기회를 잡았지만 김 대표의 얼굴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먼저 국내 기업과 손잡고 관련 기술을 선보인 뒤 세계 시장으로 진출할 수 있었는데 글로벌 업체에 선수를 빼앗기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렇다고 국내 기업과 손을 잡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김 대표는 “국내 다른 대기업들이 공동 사업을 제안했으나 거절했다”며 “지금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한국 대기업을 믿을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중소기업인들은 불법 행위로 손해를 끼친 상대방에게 고액의 손해 배상을 물리는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도입되면 사정이 나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김 대표는 “그것도 중요하지만 서로 믿고 거래할 수 있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말했다. “애플은 콘텐트나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해 앱스토어에 올리는 개발자에게 판매이익의 70%를 준다. 이것을 보면서 (외국행을) 결심했다. 대·중소기업 상생은 서로 만나서 악수하고 사진 찍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대기업이 먼저 믿음을 보여줘야 한다.”



이상재·김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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