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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66) 미8군 사령관의 방문

중앙일보 2010.09.02 00:32 종합 10면 지면보기
기자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6·25전쟁이 터진 뒤 벌써 1년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미 휴전협상은 벌어지고 있었고, 38선 주변의 각 전선에서는 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소모전 양상의 전투만 펼쳐지고 있었다. 세계적인 규모의 게릴라 토벌 작전이 벌어지고 있던 지리산은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를 비롯한 사회 각계의 지대한 관심이 몰렸다.


‘에어포켓’에 L19 수십m 곤두박질 … 지리산은 하늘도 험했다

이를 반영하듯 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지리산 주변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치열한 취재전을 벌였다. 작전이 시작되자 전황(戰況)이 어떻게 펼쳐지는지에 대한 관심이 기자들의 취재 욕구를 자극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들에게 할 말이 별로 없었다. 작전이 벌어지고 이틀이 지날 때까지 이렇다 할 만한 전과(戰果)가 나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미 8군도 이 작전을 매우 중요시했다. 38선 남북에 형성된 전선(戰線)으로 끊임없이 보급물자를 올려 보내야 하는데, 지리산 인근에서 빨치산이 활동할 수 있도록 방치한다면 전략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빨치산이 이 지역에 자리를 틀면서 전라도와 경상도를 감제(瞰制)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전선에서 전쟁을 제대로 치를 수 없었던 것이다.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그래서 나를 대규모의 토벌대 사령관으로 임명해 지리산으로 보낸 것이었다. D데이로부터 이틀이 지나자 나는 그런 부담에 더욱 시달려야 했다. 작전 상황판을 계속 살펴보고 토벌대 일선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모두 챙겼지만 더 이상의 전과는 없었다. 적들은 깊은 산속에서 토벌대의 총구를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면서 정면대결을 피하고 있었다.



1951년 12월 전남 담양에서 붙잡힌 빨치산과 부역자들. 지리산 토벌대 ‘백 야전전투사령부’는 작전 개시 사흘째인 12월 4일 본격적으로 지리산 일대에 숨어 있던 빨치산을 소탕하기 시작했다. 종군작가 고 이경모씨의 작품으로 『격동기의 현장』(눈빛)에 실려 있다.
나는 전용 L19 경비행기에 하루 평균 두 번 올랐다.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이었다. 오전에는 그래도 괜찮았다. 지리산 상공의 기류가 오전에는 요동을 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후 비행이었다. 기류가 급변했다.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면서 비행기는 수십m를 곤두박질치는 ‘에어 포켓(air pocket)’ 상태에 빠졌다.



나는 보통 헬멧을 쓰고 비행기에 올랐다. 거센 바람으로 하강기류(下降氣流)를 맞아 비행기가 급히 아래로 곤두박질치면 나는 여지없이 머리를 비행기 천장에 부딪치곤 했다. 철모가 있어서 그나마 충격은 덜했다. 처음에는 그런 상황에 익숙지 않았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멀미를 참다가 수도 없이 구토를 하곤 했다. 그래도 고집스럽게 비행을 계속했다.



작전 상황을 직접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전의 게릴라 소탕전은 시늉만 그럴 듯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토벌을 맡은 작전 부대는 산에 오르지 않았으면서도 작전을 수행했다고 허위 보고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부하들에게 대공포판을 부착하고 산에 오르도록 한 뒤 지휘관들에겐 직접 비행기를 타고 상공(上空)으로 올라가 이를 확인토록 내가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작전의 최종 지휘를 책임진 내가 에어포켓 때문에 비행을 주저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작전 개시 뒤 이틀까지 성과가 나타나지 않자 나는 맥이 빠졌다. 기자들은 사령부에 모여들어 전황과 함께 전과를 듣고 싶어 했다. 그런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는 점이 매우 곤혹스러웠던 게 사실이다.



이틀째의 작전이 결국 성과를 보지 못하고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때 남원의 사령부로 밴플리트 8군 사령관이 찾아왔다. 나는 그를 내 사무실로 맞아들인 다음 “지금까지 전과가 별로 없다”고 솔직하게 보고했다. 이번 작전을 전략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시하던 밴플리트 장군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



그는 내 보고를 한참 듣고 나더니 “좀 더 기다려 보라. 너무 걱정은 하지 말라.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리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격려 발언만 했다. 더구나 얼굴에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나는 밴플리트 장군의 반응에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나만큼 토벌작전의 성과를 기대하고 있을 미 8군 사령관의 태도 치고는 매우 의외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앞에서도 소개했듯이, 그리스에서 반정부 게릴라 작전을 매우 성공적으로 치른 노련한 군인이었다. 그는 우세한 화력과 병력으로 천천히 게릴라를 몰아야 한다는 점을 내게 강조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밴플리트 사령관은 자세한 말을 하지 않았다.



포위망이 치밀하고, 작전계획을 그에 맞춰 정밀하게 짰다면 시간은 병력과 화력 면에서 우수한 토벌대의 편이라는 게 그의 생각인 듯했다. 나도 더 이상의 발언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의 반응에서 나는 ‘속도에 상관하지 말고 천천히, 치밀하게 작전을 펼쳐라’는 메시지를 읽었다.



그저 작전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밴플리트 사령관은 다른 당부 발언 없이 그대로 돌아갔다. 그가 서울로 돌아간 뒤 나는 다시 작전상황을 점검해 봤다. 큰 이상은 없었고, 단지 빨치산 주력이 모습을 감추며 도망치고 있다는 판단만이 들었다. 그러나 밴플리트 사령관이 내게 전했던 기다림의 전략은 이튿날 적중했다. 작전 개시 사흘째에 드디어 뭔가가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사령부의 내 사무실에 놓인 전화기와 무선으로 토벌대가 전하는 소식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빨치산과의 교전 상황, 그리고 그 뒤에 벌어진 전과를 알리는 보고였다. 빨치산은 역시 나뭇잎이 떨어지고 흰 눈이 쌓인 겨울의 지리산에서 깊이 몸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작전상황판이 부산해지고 있었다. 교전 상황과 그 결과를 알리는 표지물이 상황판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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