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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클립] 뉴스 인 뉴스 <133> 조선시대 가옥

중앙일보 2010.09.02 00:22 경제 18면 지면보기
경주 양동마을과 안동 하회마을이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수백 년 된 집을 지키며 살아온 이들 덕분입니다. 이처럼 이 땅 곳곳에 조선시대 가옥이 남아있습니다. 최근 문화재청에서 『문화재대관 중요민속문화재-가옥과 민속마을』 전 3권을 발간했습니다. 여기 실린 김광언 인하대 명예교수, 강영환 울산대 교수 등의 글과 사진자료를 토대로 조선시대 가옥의 특징을 살펴봅니다. 우리 조상들의 생활철학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습니다.


곳간 열쇠 쥔 안방마님의 안채, 바깥양반의 사랑채보다 높게 지었죠

이경희 기자



성리학 규범 스며들다



전남 해남 윤두서 고택의 ㄷ자형 안채. 안방과 대청이 있는 본채는 기단을 높여 중앙에 높게 배치했다. 왼쪽에 보이는 부엌의 측면에는 바람이 잘 통하도록 살창을 달았다. [문화재청 제공]


경북 봉화군 송석헌의 배치도.
조선시대 나라를 다스리던 사대부는 성리학자였다. 성리학은 통치이념일 뿐만 아니라 개인과 가정을 다스리는 규범이나 이념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양반 관료사회로 전환되면서 사대부 주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가부장적 직계가족 제도로 변화하면서 연령과 세대, 남녀 생활영역의 구분 등을 고려한 주거형식이 도입됐다. 주거의 중심은 여전히 안채 대청이었으나, 가장의 공간인 사랑채가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게 된다.



조선 중기에는 씨족마을이 건설되고 성리학적 생활문화가 정착됐다. 가장의 역할이 증대되면서 사랑채가 확대되고 기능이 분화된다. 사랑채에 누정을 두고 나무와 화초를 심거나 작은 연못을 만들어 꾸몄다. 사랑채가 제사와 손님맞이, 학문·수양 등의 복합적 기능을 수용하면서 독립된 별당으로 건립되기도 했다.



조상숭배  왕실서 사대부도, 일반 백성도 사당 짓게



① 경주 양동마을 서백당 사당.
조선시대 가정에서 최고의 덕목은 효였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사대부뿐 아니라 일반 백성에게도 가묘(家廟·사당)를 건립하도록 강요했다. 집을 지을 땐 사당터를 먼저 잡고, 다른 건물보다 높은 곳에 세웠다. 한번 지으면 헐지 않는 것이 철칙이었다. 사당은 흔히 세 칸(방의 수 개념)으로 짓고, 주위에 담을 두르고 문을 달았다. 주변을 아름다운 꽃과 풀로 꾸미고, 비싼 단청을 입히기도 했다.



경주 양동 서백당(사진1·중요민속문화재 23호)은 사당터가 대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사당에는 조상이 살아계신 듯 여겨 매일 문안을 올리고 음식을 차렸다. 사당이 없는 집은 마루 뒷벽 위쪽에 작은 사당 벽장을 만들어 위패를 모셨다.



부부유별  딴방 쓰는 부부, 비밀통로 만들고 ‘밤일’



내외법에 따라 부부가 별도의 침실을 갖도록 제도화됐다. 남자 중심의 사랑채와 여자 중심의 안채로 나눈 뒤 두 건물 사이에 담을 치고 문을 달았다. 사대부 집안에서 부부가 함께 있는 모습이 남의 눈에 띄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아들을 낳아 대를 잇는 것이 여자의 중요한 임무였던 그 시절에 부부를 분리해 놓으면 후사는 어떻게 봤을까. 이를 위해 집집마다 비밀통로를 마련해 뒀다.



전북 정읍 김동수씨 가옥(중요민속문화재 26호)에선 안채 담의 일부를 조금 터놓았다. 보통 땐 수숫대 따위로 가려두고, 유사시엔 가재걸음으로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게 했다. 경북 봉화군 송석헌(중요민속문화재 249호)은 사랑채와 안채 뒤쪽에 툇마루를 이어붙여 ‘가막마루(가만히 다니는 마루)’를 만들었다. 남편의 출입이 밤에만 잠깐씩 이루어지니 신혼 초기에는 새색시가 신랑 얼굴을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부부가 이럴 정도니 외간 남자가 안채로 들어갈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내외벽’을 치거나 ‘내외담’을 쌓아 안채에 이르는 외간남자의 시선까지 막기도 했다.



집을 사고 팔 때도 안채에는 들어가보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상류가옥에는 여성 전용 안뒷간과 남성 전용 바깥뒷간이 있었다. 양반 계층뿐 아니라 중산층 주택에도 유교적 가치관이 반영되곤 했다. 시어머니가 죽은 이후에야 며느리가 안방을 차지할 수 있었고, 남편은 사랑방에 거처하며 부부가 각방을 썼다. 그러나 여성이 모든 면에서 차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안채는 통상 사랑채보다 높이 지었다. 사랑채 지붕이 안채보다 높으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안주인이 집안을 꾸리고 종을 부리는 등의 살림권을 쥐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주인남자는 사랑채에 기거하더라도 임종은 안채에서 맞았다. 안채는 어머니의 자궁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남녀유별 관념은 점점 희박해졌고, 18세기 후반부터 안채와 사랑채가 하나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장유유서  아버지·아들이 쓰는 사랑, 크기와 격 달라



어른과 아이는 순서가 있다는 장유유서의 개념은 건축에도 반영됐다. 사랑채에서 아버지가 기거하는 방은 큰사랑, 아들의 방은 작은사랑이다. 안채도 시어머니방은 안방 혹은 큰방이라 부르고, 며느리의 방은 건넌방이나 며느리방이라 불렀다. 큰사랑은 두 칸이지만 작은사랑은 단칸이다. 큰사랑은 전면에 배치해 볕이 잘 들고 대청마루를 끼고 있어 쾌적하다. 방만 한 칸 달랑 있는 작은사랑과 달리 큰사랑엔 다락과 골방·벽장 등의 부속공간이 딸려 있다.



안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시어머니는 부엌과 대청, 곳간의 열쇠까지 차지했다. 특히 경상도 상류가옥의 고부 격차가 크게 나타났다. 며느리방은 장판도 없이 흙바닥에 자리를 깐 경우가 많고, 반자(지붕 밑을 편평하게 만드는 각 방의 윗면)가 없어 서까래의 뱃바닥이 그대로 드러났다. 형제간에도 위계가 있었다. 제사를 중시해 맏아들에게 재산을 몰아주는 장자 우대 상속제도의 영향이다. 사당에서도 중앙의 출입문은 장손만 드나들고 나머지 사람은 옆문을 썼다. 시어머니는 화로를 맏며느리에게 물려줬고, 대를 이어 내려오는 음식 비법 따위도 맏며느리에게만 일러줬다.



상명하복  대문 옆 곳간·마굿간·행랑방이 줄줄이 ‘줄행랑’



② 경북 봉화군 송석헌 사랑채.
건축은 신분과 위계를 드러냈다. 경북 봉화군 송석헌의 사랑채(사진2)는 축대가 세 벌에 높이가 3.6m에 달하고, 마루로 오르려면 댓돌 세 개를 거쳐야 한다. 안채나 사랑채를 높이 세워 양반들은 늘 높은 데에서 ‘아랫것’들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행랑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곳간·마굿간·헛간, 아랫사람들이 기거하는 행랑방 따위의 부속공간이 늘어선 것을 일컫는다. 살림의 규모가 큰 상류가옥은 자연히 행랑채도 컸다. 거대한 행랑채와 솟을대문은 상류주거임을 보여주는 장치였다.



③ 전남 구례군 운조루 행랑채와 솟을대문.
강원도 강릉 선교장(중요민속문화재 5호)의 행랑채는 20여 칸, 전남 구례 운조루(사진3·중요민속문화재 8호)는 19칸에 이른다. 이렇게 줄지어선 행랑을 ‘줄행랑’이라 한다. 행랑방에 기거하는 종이 주인의 심부름을 하려면 들고 뛰어야 했기에 ‘줄행랑을 놓다’가 ‘재빨리 줄달음치다’를 뜻하는 관용어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조선 후기에는 신분제도가 흔들리면서 노비 수가 줄어 행랑채를 줄여 큰 규모의 창고를 만들기도 한다. 한편 양반의 주거에 비해 서민의 주거인 ‘민가’는 성리학적 규범이나 권위를 표현할 필요가 없었다. 네다섯 칸 정도의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생산공간과 주거공간이 일체화된다. 양반 가옥에 비해 지역적 특성도 더 잘 드러난다.



지역적 특성 배어나다



춥고 산 많은 북부  외벽은 두껍게, 방은 겹겹으로




강원도·경기도 등 한반도의 북부지역은 겨울이 길고 추우며, 평야보다 산지가 많다. 주민들은 논농사보다는 화전이나 수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추위를 물리치고 위험으로부터 막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난방과 방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주거공간을 가급적 하나의 건물에 집중시켰다. 방이 겹으로 배열되는 ‘겹집’ 형태에 외벽은 두껍게 만들고 두꺼운 반자로 천장을 마감했다. 창이나 문의 면적도 줄였다.



구릉지 많은 호서  뒤에 산, 앞에 연못의 인공 조경



서해안을 끼고 있는 호서지역엔 험준한 산악이 드물고 대부분 해발 800m 이내의 낮은 산, 구릉지가 많은 지형이다. 지리적으로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하던 곳이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주거문화를 스스럼없이 수용해 자기 것으로 만들어냈다. 인공정원과 연못도 두드러지게 발달했다. 농경지와 인접한 평지나 구릉지에 산을 등지고 집을 배치하다 보니 집 주변의 자연경관이 빼어날 수 없었기에 조경에 공을 들인 것이다. 아산 외암마을 건재고택은 집안으로 물길을 끌어들여 섬이 있는 연못을 만들고 정원을 꾸몄다. 호서지역의 반가는 대부분 안마당을 둔 튼 ㅁ자형을 취하고 있다. 사랑채와 부속채, 안채 등을 약간의 간격을 두고 배치해 다소 흐트러져 보이기도 하고, 여유 있어 보이기도 한다. 본채는 기와집으로 하고 부속채는 초가로 만드는 등 기와집과 초가를 뒤섞어 지은 형태도 많이 보인다.



푹하고 평탄한 남부  통풍 잘 되게 일자형 건물 분산·배치



남부지역은 여름이 길고 고온다습하며, 비교적 넓은 평야지대다. 대규모 논농사를 짓기 위해 조직화된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자연히 규모가 크고 밀도가 높은 마을이 조성됐다. 주거건축은 통풍과 환기가 잘 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뒀다. 전라도와 경남 지방에서는 살림채와 부속채 등 일(一)자형 건물들이 각기 독립돼 ㅁ자형으로 배치된 분산형 주거가 발달했다. 넓은 창호와 툇마루도 발달했다.



바람·눈 많은 섬  울릉도선 눈 막는 벽 ‘우데기’ 설치



④ 울릉도 나리동 투막집. 벽체에 우데기를 둘렀다.
제주도 등 섬 지역엔 ‘겹집’이 흔하다. 그러나 북부 지역의 겹집과는 성격이 다르다. 제주도는 살림채 중앙에 마루가 설치되고, 취사용 아궁이와 난방용 아궁이가 구분됐다. 따뜻한 지역이라 추위가 아닌 바람을 막기 위해 겹집을 만든 것이다. 겨울에 폭설이 내려 통행이 어려운 울릉도는 처마 밑에 ‘우데기(사진4)’라는 가벽을 설치해 눈이 집 내부공간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내부의 벽도 통나무를 수평으로 쌓아 만든 ‘귀틀벽’이다. 수직하중에 강한 구조라 눈이 쌓여도 집이 무너지지 않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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