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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하얀 면장갑

중앙선데이 2010.08.21 01:39 180호 2면 지면보기
주얼리 전시회나 시계 박람회를 가면 직원들이 거개가 하얀 면장갑을 끼고 있습니다. 고가의 제품(혹은 작품)을 다룰 때 그만큼 조심하기 위해서지요. 경매장을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신사동 한복판에서 저는 다시 하얀 면장갑을 보았습니다. 현대카드가 20일부터 한시적으로 문을 연 ‘타센(TASCHEN) 팝업스토어’에서였습니다. 타센은 베네딕트 타센이 1980년 설립한 독일의 예술서적 전문 출판사입니다. 순수미술, 사진, 디자인, 패션, 영화, 건축 등 예술의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지요. 심지어 동성애나 성인 잡지 이미지까지도 예술로 승화시킨다는 것을 모토로 하고 있습니다.

지난 2월부터 온라인에서 타센 북스토어를 운영 중인 현대카드가 타센 설립 30주년을 맞아 강남 한복판에 주말(금 오후 4~9시, 토·일 오후 1~9시)에만 문을 여는 책 전시장을 차렸습니다. 10월 초순까지 이곳을 찾으면 국내 미수입 도서와 인기 도서 300여 권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펼치면 거의 경차 보닛만 한 크기에 480쪽에 이르는 헬무트 뉴튼의 사진집 『SUMO』입니다. 도발적인 유럽 문화계 현장을 가감 없이 담아낸 이 사진집은 1만 부 한정판이 출판과 동시에 매진되면서 중요한 컬렉션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죠. 이번에 전시된 ‘3934번째 에디션’을 보기 위해서는 직원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하얀 면장갑에 까만 정장 차림의 직원이 서너 쪽씩 넘겨주는 대로, 아주 천천히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장갑으로 조심스레 넘겨주는 책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사진집 속 작품들이 새삼 귀한 ‘작품’으로 보였습니다. 덩달아 그런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저의 모습도 어느새 고급스러워진 느낌이었습니다. 고급스러움을 즐기고 그런 대접을 받는다는 우월감. 책을 보며 이런 느낌을 받기는 또 처음이었습니다. 이 회사가 이번 전시에서 진짜 추구한 것도 아마 이런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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