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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투 글러브 대신 토슈즈를 택한 소년, 세상을 향해 날다

중앙선데이 2010.08.21 01:28 180호 5면 지면보기
한 기업이 세운 호화스러운 극장에서 탄광 노동자들의 파업 선동가를 듣는다. 예술 세계에서는 이런 일도 현실이 된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이처럼 이색적인 경험을 제공하는, 울림이 강한 작품이다. 그 울림이 동시대적이며 실감나기 때문에 대개 현실과 동떨어진 낭만적 세계에 익숙한 뮤지컬 관객이라면 새로운 느낌을 받았을 법하다.

정재왈의 극장 가는 길 -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오픈런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실화가 바탕이다. 영국 북부 탄광 노동자의 자식으로 최고 명문 로열 발레단 무용수가 된 필립 마스덴이 모델이다. 극작가 리 홀이 이 실화를 뮤지컬로 각색했다. 노동계급 출신인 홀의 또 다른 대표작으로는 1930∼40년대 광부화가 집단으로 영국 미술사에 독특한 족적을 남긴 ‘애싱톤그룹’을 소재로 한 희곡 ‘광부화가들’이 있다.

드라마 속 빌리는 영국 북부 더햄이란 탄광촌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아들이다. 80년대 ‘잉글리시 페이션트’(저생산성의 영국병)를 고치겠다며 대처 보수당 정부가 탄광 민영화를 선언하자 생존에 위협을 느낀 이곳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맞선다. 11세 빌리의 아버지와 형도 그 대열 맨 앞에 있다. 엄마가 없는 빈자리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지키고 있다.

방과후 권투를 배우던 빌리는 어느 날 발레 수업을 보고 글러브 대신 토슈즈를 선택한다. 그의 천재적 재능을 간파한 발레 선생 윌킨스 부인의 격려에 힘입어 빌리는 발레리노의 꿈을 키워간다. 빌리의 이 예정된 꿈이 신분과 성적 편견을 극복하고 로열 발레 스쿨의 일원으로 현실화되는 과정이 ‘빌리 엘리어트’ 이야기다.

이런 불굴의 성공 스토리(도약이 특징인 발레는 그래서 매우 상징적이다)는 현실에서 흔하진 않지만 픽션을 가미한 예술 세계에선 쉽게 접하는 일이다. 한데 다 감동을 주진 못한다. 뮤지컬의 진솔한 전개는 그런 오해를 넘어섰다. 파업노동자와 경찰이 시가전으로 격렬하게 대치하는 등 무대는 자못 긴장됐지만, 십시일반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훈훈한 정과 뜨끈뜨끈한 가족애는 객석 깊숙한 곳까지 전해졌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동명 영화(2000년)의 뮤지컬 버전이다. 예의 이야기 말고, 영화에 삽입된 매튜 본의 댄스뮤지컬 ‘백조의 호수’ 비상 장면으로 유명세를 탔다. 국내 모 기업의 광고에서도 응용된 이 장면을 뮤지컬에서는 2막 초반 ‘드림발레’ 시퀀스로 처리했다.

성탄절날, 차이콥스키의 발레 음악을 배경으로 빌리는 성공한 발레리노의 모습을 상상하며 하늘을 난다. 끈을 매달아 공중을 나는 플라잉 기술이 등장하는 이 장면을 뮤지컬은 어린 빌리와 성인 빌리의 2인무(파드되)로 풀었다. 흔한 남녀가 아닌 남남끼리 엮는 파드되의 이채로움이 눈에 띄었다.

이밖에 서막 파업을 상징하는 ‘별들이 지켜보네’를 비롯해 광부들의 시위와 빌리의 발레 교습 장면을 오버랩한 ‘연대(Solidarity)’, 귀엽게 동성애적인 기미를 풍기는 친구 마이클과 빌리가 함께 춤을 추는 ‘네 자신을 표현해 봐’, 아버지의 반대로 발레의 꿈을 접어야 할 위기에 처한 빌리가 울분을 토로하는 1막 피날레 ‘분노의 춤’ 등이 인상적 장면들을 구성했다.

이미 ‘라이온 킹’과 ‘아이다’를 통해 팝스타에서 뮤지컬 작곡가로 거듭난 엘튼 존은 독창적인 모던발레 안무를 구사한 피터 달링의 참신함에 어느새 조연으로 물러난 느낌이다. 확실히 ‘빌리 엘리어트’는 듣는 뮤지컬보다는 보는 뮤지컬에 가까웠다. 아마 이 점은 연출자 스티븐 달드리가 동명 영화를 직접 연출한 전력이 있다는 점에 기인할지도 모른다.

소년이 주인공인 만큼 뮤지컬의 구심력은 역시 빌리였다. 사회성 짙은 소재라는 특이성과 더불어 이 점 또한 우리가 많이 경험한 성인 중심의 여느 영미 뮤지컬과는 차별화됐다. 찰스 디킨스 원작의 뮤지컬 ‘올리버 트위스트’와 김민기 연출의 ‘지하철 1호선’ 정도가 비교 대상이 될 것 같다.

영국·미국·호주에 이어 세계 네 번째 제작국가인 한국의 빌리를 찾는 과정은 뮤지컬 스토리에 버금갈 정도로 험난했다고 한다. 이렇게 뽑힌 갓 열 살을 넘긴 발레 영재 김세용·이지영·임선우·정진호 네 주인공의 어깨 위에 ‘오픈런’(폐막일을 정하지 않고 하는 장기 공연)이라는 무거운 짐이 실렸다.

뮤지컬은 거친 사회적 발언의 심각함을 무마하기 위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코믹한 장면과 대사를 곳곳에 배치했다. 보는 재미는 배가됐지만 이 와중에 어린 입에 튀어나오는 육두문자를 예쁘게 봐주긴 어려웠다.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무기한 공연.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를 거쳐 LG아트센터 기획운영부장과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서울예술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공연예술 전문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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