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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View 정명훈의 ‘음식 교향곡’] ‘아버지 햄버거 가게, 1년 만에 망한 이유 …’

중앙일보 2010.08.21 00:10 주말섹션 14면 지면보기
나는 어려서부터 음악을 했다. 일곱 살에 서울시립교향악단과 하이든 피아노 협주곡으로 데뷔했다. 하지만 14살이 되기 전까지는 음악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 말도 한 적이 없다. 나는 자전거로 쌩쌩 달리며 놀았고, 부모님의 식당 일을 돕는 것이 제일 재미있는 아이였다.



우리 가족은 1961년 미국 시애틀로 건너갔다. 한국에서 식당을 하셨던 어머니는 이곳에서도 한식 레스토랑을 열었다. 돈 주고 사람을 쓸 형편이 아니어서 100% 가족 레스토랑이었다. 요리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아버지가 희한하게도 주방에 들어가셨다. 당시 누나들(정명화·경화)은 뉴욕에서 공부하던 때다. 시애틀에는 남자 형제 셋이 있었다. 나보다 한 살 위의 형과 두 살 아래의 동생. 나는 여덟 살이었다. 덩치가 컸던 형은 어머니를 도와 웨이터 역할을 맡았다.



나의 무대는 주방이었다. 집에 있다가도 손님이 왔다는 전화를 받으면 자전거를 타고 잽싸게 달려왔다. 집과 식당은 불과 3㎞ 떨어져 있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불고기 등 기본적인 한식 메뉴를 이때 익혔다. 그중 내가 가장 공들였던 메뉴는 새우튀김이다. 당시 미국에는 일본식 새우튀김이 많았다. 한국식보다 두껍고 좀 더 고소하다. 우리는 새우를 절반으로 잘라 옆으로 눕혀 튀김옷을 살짝 입혔다. 넓고 판판하게 만들어 조심스럽게 기름에 넣는다. 기름의 온도도 중요하지만 더 결정적인 건 새우를 넣는 방식이다. 아주 단순해 보이지만 조금만 잘못 눕혀서 넣으면 모양이 쭈그러진다. 나는 이 새우튀김을 예쁘고 맛있게 만드는 데에 매혹됐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 한국 음식은 낯선 것이었다. 아무도 알지 못했다. 손님이 거의 없었고, 어떤 날은 한 명도 오지 않았다. 부모님에게는 힘든 일이었지만, 덕분에 나는 피아노를 칠 수 있었다. 식당 한쪽에 작은 피아노가 있었기 때문이다. 손님이 없는 날은 여기에서 피아노를 쳤다. 키가 작아 페달에 발도 닿지 않던 때였다. 이때 땅과 발 사이에 놨던 작은 발판이 있다. 피아노를 치다가 식당에 손님이 오면 이 발판을 주방에 놓았다. 거기에 올라서서 아버지와 함께 간을 맞추고 새우를 튀겼다.



부모님의 한식당은 5년 후 문을 닫았다. 대신 1966년 햄버거 집을 열었다. 이제 와 말이지만, 이 장사를 만약 계속했다면 우리 가족은 대단한 부자가 됐을 것이다. 아버지의 특제 햄버거 소스 덕분이다. 보통 맥도날드 같은 햄버거는 고기 위에 소스를 얹는 식이었다. 우리는 아예 고기를 양념했다. 마늘을 넣어 한국적인 맛도 살리고, 불 냄새가 나도록 고기를 구워 바비큐처럼 만들었다. 지금도 생각날 만큼 기가 막힌 맛이다. 나는 결혼 후 고기 대신 생선·샐러드 위주로 식사하는 아내 덕에 식성이 바뀌었다. 하지만 아버지 햄버거에 대한 기억은 나의 ‘패스트푸드 본능’을 되살리곤 한다.



햄버거 이름도 히트했다. 가장 큰 것은 파파 버거, 그 다음은 마마 버거였고, 가장 싸고 작은 것은 베이비 버거라고 이름 붙였다. 가게 이름은 ‘버거 헛(Burger Hut)’. 피자 헛이 아직 유행하기 전이었다. 우리 가족이 햄버거 집을 더 오래 했으면 피자 헛과 양대 산맥을 이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한국 인심이다. 예전 한식당에서는 불고기 1인분에 1달러95센트를 받고 각종 반찬에 밥까지 줬는데, 햄버거와 밀크 셰이크도 정량보다 많이 주곤 했다. 결국 햄버거 가게는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나는 아버지 옆에서 햄버거, 프렌치 프라이, 밀크 셰이크 만드는 것을 도왔다. 신문 배달, 잔디 깎기 등 용돈 벌이도 많이 했다. 기계적으로 음악 공부를 하는 것보다는 이런 일들이 더 재미있었다. 나는 지금도 신문을 차곡차곡 접을 줄 안다. 잔디를 깎으며 푼돈을 버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일찍이 배웠다.



만약 이때, 열 살이 되기 전에 피아노의 테크닉 연습을 열심히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내가 피아니스트가 되지 않고 결국 지휘자를 선택한 것은 이 시절 경험 때문인 것 같다. 피아니스트로 대성하는 이들은 이 시기에 기술적인 것들을 완성해 놓으니 말이다.



내가 이렇게 시애틀을 휘젓고 다니며 놀고, 주방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것은 전적으로 우리 어머니의 교육 방식 때문이다. 어머니는 일곱 남매 하나하나의 특징을 찾을 때까지 진득하게 기다리셨다. 그리고 아이가 스스로 결정을 하면 그때부터는 뒤에서 굉장하게 밀어주셨다. 유난히 말도 없던 나는 14살이 돼서야 “음악가가 되겠다”라는 선언을 했다. 뉴욕의 지휘자 주빈 메타를 찾아가 개인 오디션을 본 후였다.



덕분에 그 이후로는 찌개와 튀김, 햄버거와 셰이크를 만드는 즐거움을 누리지는 못하게 됐다. 하지만 어린 시절 봤던 그 맛과 요리가 주는 기쁨은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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