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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의 차이니즈 리더십] 후진타오의 ‘그룹 스터디’, 장쩌민파 KO 시키다

중앙일보 2010.08.21 00:05 주말섹션 12면 지면보기
‘Who’s Hu(후가 누군가)?’



2002년 미국의 ‘위클리 월드’가 후진타오(Hu Jintao, 胡錦濤·사진) 당시 중국 국가부주석을 커버스토리로 다루며 썼던 표현이다. ‘익숙하지만 어딘가 낯설다’는 그런 인식이 깔려 있다. 한편으론 ‘후가 뭐 그리 대단한 인물인가’ 하는 냉소도 느껴진다. 후진타오가 그해 가을 총서기에 올라 중국의 1인자가 된 지 8년. 이젠 그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알쏭달쏭하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그의 언어, 그의 행동 어디를 봐도 튀는 구석이라곤 없다. 그의 리더십은 강렬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다. 대중적 인기는 오히려 원자바오(溫家寶) 총리가 더 높다. 후 주석은 바른 말만 하는 교과서에 가깝다. 무미건조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그가 이끄는 ‘13억의 중국호(中國號)’는 똘똘 뭉쳐 승승장구 중이다. 특히 총서기 취임 당시 그를 위협하던 최대 정적(政敵)인 상하이방(上海幇)이란 말은 이제 그 용어조차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는 어떤 마법 같은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것일까.



유상철 기자



후진타오 리더십의 원천으로 일부에선 겸손함을 꼽는다. 신중함을 드는 사람도 있다. 글쎄다. 나는 ‘학습’을 꼽고 싶다. 중국의 정치학자 샤오궁취안(蕭公權)은 공자의 치술(治術)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했다. 첫째는 돌보아 주는 것(養), 둘째는 가르치는 것(敎), 셋째는 다스리는 것(治)이다. 후진타오는 이 중 교육에 올인하고 있다. 백성을 이끌기 위해서는 리더의 솔선수범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는 단기적 방편이다. 장기적인 안목에서 계획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기 위해선 교육이 첫째라는 것이다. 흔히 선정(善政)보다는 선교(善敎)가 낫다고 한다. 선정은 두려워하는 것이지만 선교는 마음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리더십이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던 2002년 11월, 그가 이제 막 13억의 1인자인 중국공산당 총서기에 올랐을 때를 보자. 당시 그를 둘러싼 권력 구조는 한마디로 사면초가(四面楚歌) 형세였다. 중국공산당 최고지도부인 정치국 상무위원 9명(표 참조)의 구성 자체가 그의 외로운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 아홉 중 다섯 명이 장쩌민(江澤民) 전 총서기가 이끄는 상하이방 출신이었다. 상하이방은 서열 5위를 중심으로 정확하게 대칭적인 구도를 형성했다. 즉 서열 5위에 장쩌민의 오른팔로 불리던 쩡칭훙(曾慶紅) 국가부주석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위쪽으로 2위엔 전국인민대표대회(全人大, 국회격) 상임위원장인 우방궈(吳邦國), 4위에 자칭린(賈慶林) 전국정치협상회의(政協) 주석이 포진했다. 아래로는 6위에 황쥐(黃菊) 부총리, 8위에 선전·언론 담당의 리창춘(李長春)이 받쳐주는 모양새를 취했다. 후진타오 입장에선 한 발 삐끗했다가는 언제든지 나락으로 떨어질 만큼 라이벌 세력의 짜임새는 강했다.



한편 서열 3위인 원자바오는 무색무취로 어느 파벌에도 속하지 않는다. 또 서열 9위인 뤄간(羅幹)은 퇴임한 리펑(李鵬) 전 총리가 자신의 지분을 행사해 추천한 인물이다. 그나마 후진타오와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인사는 7위의 우관정(吳官正) 중앙기율검사위 주임 정도에 불과했다. 정치국 상무위원 구성이 왜 이렇게 1인자 후진타오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것처럼 이뤄진 것일까. 중국의 권력 판도라는 게 전임자가 짜 준 모양새를 따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볼 때 후진타오 입장에서는 무얼 도모하고자 해도 뜻대로 될 수 없는 형국이었다. 자, 이 같은 절대 열세의 난국을 후진타오는 어떻게 타개하고자 한 것일까. 정책의 입안과 실행에 있어 어떻게 라이벌 세력의 협조를 이끌어내려 했을까. 후진타오는 그 해답을 학습에서 찾았다. 무슨 학습인가. 정치국 상무위원 9명 전원이 참여하는 ‘정치국 집단학습(政治局 集體學習)’을 그가 이끄는 4세대 리더십의 진원지로 선택한 것이다.



중국 지도부의 집단학습 전통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중앙서기처 서기였던 시중쉰(習仲勳, 시진핑 현 중국 국가부주석의 아버지)과 완리(萬里) 등이 시작했다. 이후 장쩌민 집권 13년간 1년에 한 차례 정도 간헐적으로 열렸다. 후진타오는 그러나 총서기에 오르자마자 이 정치국 집단학습을 정례화했다. 2002년 12월 26일 마오쩌둥(毛澤東) 탄생 109주년 되는 날에 ‘헌법을 배우자(學習憲法)’를 첫 주제로 선택했다. 인치(人治)의 대명사가 태어난 날 법치(法治) 공부에 나서며 변화를 추구한 것이다. 후진타오가 처음 정치국 집단학습을 개최할 때만 해도 세간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집권 1기(2002년 11월~20007년 10월) 5년 동안 정치국 집단학습은 무려 44회나 개최됐다. 집권 2기인 2007년 10월부터 지난 7월까지는 22회가 더 열려 무려 66회를 기록 중이다. 후는 이 집단학습을 반대파를 설득하고 제4세대 집단지도체제의 합의를 이끌어내는 장(場)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석 달에 두 번 열리는 정치국 집단학습의 주제는 철저하게 치국(治國)과 관련된 것이다. 러시아로 ‘석유 외교’를 펼치러 갈 때는 ‘국제 에너지 형세’를 공부하고, 동북공정으로 한·중 관계가 껄끄러울 때는 ‘중국민족관계사’를 공부하는 식이다. 당 중앙정책연구실과 당 중앙판공청, 관련 부처 등이 현안을 중심으로 협의해 결정하지만 주제 선택에서 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게 특징이다. 후진타오로서는 티나지 않게 어젠다 선점에 나서는 것이다.



집단학습은 후진타오의 개회 선언으로 시작돼 보통 두 명의 강사가 연단에 오른다. 강의 후엔 질의응답 형식의 열띤 토론이 이어진다. 마무리는 당연히 후진타오의 몫이다. 즉 중국의 진로와 현안 처리를 둘러싸고 전문가의 의견을 먼저 들은 다음 집단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취하는 것이다. 후진타오의 정교한 어젠다 선점, 이어지는 전문가의 강의, 그리고 어젠다에 대한 지도부의 가차 없는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이 마치 물 흐르듯 전개되는 모양새다.



마오쩌둥과 같은 카리스마형 지도자가 아닌 후진타오로선 바로 이런 정치국 집단학습을 통해 당 중앙의 의견을 일치시키고, 수적으로 우세인 라이벌 세력과의 이견을 줄이며, 사상을 통일해 중국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이는 중국 지도부가 정책 결정을 하는 과정에서 왜 큰 실수를 범하지 않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학습을 통한 후진타오의 리더십은 일찌감치 형성된 것이다. 80년대 중반 구이저우(貴州)성 당서기로 재직할 때 그가 교육을 강조하면서 간부 연수를 매우 중시했던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전문가를 초청해 특강을 열고, 구이저우성 간부들을 발전된 타 지역으로 보내 그곳의 경험을 학습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86년 구이저우성에는 간부연수양성센터가 242개로 늘어나기도 했다. 중국 최고 학부인 칭화(淸華)대를 나온 후진타오 자신이 구이저우 대학 전자계산기학과에 등록해 청강생으로 다니는 열성을 보였을 정도다. 이 같은 후진타오의 학습 리더십을 잘 모방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후의 파벌로 분류되는 왕양(汪洋) 광둥(廣東)성 당서기다. 후진타오 주석의 권력 기반인 공청단 출신인 그는 올해 초 탈산학습(脫産學習)을 주장하고 나섰다. 탈산학습이란 산업현장에서 잠시 벗어나 공부만 하라는 것이다. 왕양은 광둥성의 모든 처장급 이상 관리들은 올해부터 ‘하던 일을 멈추고 닷새 동안은 무조건 공부만 해야 한다’고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다. 후진타오는 중국공산당의 최고 학부이자 ‘중국 리더십 사관학교’로 불리는 중앙당교(中央黨校) 교장을 93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10년 역임했다. 고급 간부가 되기 위해선 꼭 거쳐야 하는 관문인 중앙당교에서 후진타오가 엄청난 인맥을 쌓았음은 물론이다. 장쩌민 시절의 정치학습 운동인 3강 운동(講正氣, 講政治, 講學習)의 주도자 역시 후진타오였다. 각종 학습 조직을 통해 거미줄처럼 엮인 끈끈한 ‘학맥(學脈)’이 후진타오 리더십의 진원지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적들조차 사심(私心)이 작용하지 않는 학우(學友)의 관계로 끌어들이는 리더십이다. “학습하지 않으면, 학습을 견지하지 않으면, 열심히 학습하지 않으면, 반드시 낙오할 것이다(不學習, 不堅持學習, 不刻苦學習, 勢必會落伍).” 후진타오가 던지는 ‘학습의 리더십’의 말이다.










j 칵테일 >> 미남자(美男子)



‘미남자(美男子)’. 한평생 후진타오를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1982년 말 베이징에서 중국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대표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선 공청단 1인자로 왕자오궈(王兆國), 2인자로 후진타오를 선출했다. 그러자 곧바로 ‘왕자오궈는 목청이 크고, 후진타오는 인물이 미남’이란 평가가 나왔다. 하나 후진타오의 겉이 봄바람처럼 부드럽다고 해서 속도 그럴까. 오산이다. 그는 전형적인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인물이다. 서방 언론은 그런 그를 가리켜 ‘벨벳 장갑을 낀 철권(鐵拳)’이라고 부른다. 중국 역대 어느 지도자 못지않게 강경한 공산주의자란 것이다. 하긴, 47세이던 89년 초 철모를 쓰고 직접 티베트 시위 진압에 나섰던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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