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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일제 침략에 맞서 ‘단일민족’ 의식 고취에 나선 지식인들

중앙일보 2010.08.18 00:15 종합 29면 지면보기
 
  1907년 이 땅에 온 영국 언론인 매켄지가 찍은 『대한매일신보』 편집국.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로서 근대의 산물임을 밝힌 베네딕트 앤더슨이 민족의 형성과정에서 인쇄매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듯, 영국인 베셀이 발행인이었던 이 신문은 1907년 일제가 언론 통제를 위해 만든 ‘광무 신문지법’의 적용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 땅에 근대 ‘민족’이 탄생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매체였다.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는 인종·종교·문자의 동일성에 기초한 감정과 이해의 공통성이 있다. 일본·중국·한국은 극동(極東)을 황인종의 영원한 보금자리로 지키기 위해 공동의 목표와 정책과 이상을 가져야 한다”(『윤치호 일기』 1902년 5월 7일). 황제가 나라를 지킬 군사력을 기르기보다 열강 사이에서 줄을 타며 황권을 지키려 했던 대한제국 시기(1897~1905). 이 땅의 지식인들은 러·일의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황인종주의에 입각한 동양주의에 희망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 열사도 러일전쟁이 터지자 일본 부상병 치료를 위한 적십자를 만들려다 옥고를 치를 정도였다. 황제가 나라의 주인이고 ‘황인종’ 모두가 ‘동포’였던 그 시절. 공통의 문화와 역사적 전통을 토대로 영토에 기반을 둔 정치권력을 갖길 꿈꾸는 근대적 의미의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국가는 주인이요, 동양주의는 손님이다.” 신채호의 지적처럼 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가면을 벗고 침략자의 모습을 드러내자, 지식인들은 이에 맞서 나라를 지킬 저항의 주체로 민족을 애타게 호명(呼名)하기 시작했다. 이 땅의 사람들이 민족으로 다시 태어난 그때, 충성의 대상도 황제에서 민족으로 바뀌었다. 고종황제가 강제로 퇴위되고 군대가 해산되는 등 국망(國亡)의 위기가 밀어닥친 1907년부터 나라를 앗긴 1910년까지 이 땅의 신문·잡지·역사서는 ‘민족’을 부르는 계몽담론으로 차고 넘쳤다. “무궁화야! 무궁화야! 너의 땅은 십삼도 금수강산이요. 너의 주인은 이천만 신성한 민족이라. 네가 태백산 단목 아래에서 성인이 처음 나시던 해에 뿌리를 박아 부여 천년에 따사로운 신풍을 맞으며, 삼국이 성할 때에 봄빛을 자랑하고 고려 말년에 몽고의 침노하는 험한 운을 잠깐 당하였으나, 맹장(猛將)·열사의 칼이 필경 독립의 가지를 보호하여 어루만져 자라게 하였다. 본조에 이르러 중국에 조공하는 치욕은 항상 받았으나 내치외교의 도는 항상 자유로 하였더니. 슬프다! 지금에는 어찌하여 이렇게 미약한지.” 조선왕조 개창일인 1909년 8월 14일. 『대한매일신보』 1면에 실린 ‘이날에 대한동포를 위하여 한 번 경고함’이란 논설이 웅변하듯 지식인들은 단군을 선조로 하는 동일한 혈통과 역사를 공유한 ‘신성한 민족’이라는 ‘단일민족’ 관념을 만들어냈다.

일제에 맞서 정체성을 지킨 저항의 방패로 단일민족 의식은 그때는 정당했다. 그러나 머릿속 깊숙이 박힌 단일민족의 신화가 생김이 다른 이들을 차별하는 역기능을 발하기에, 새로 우리 시민사회에 진입한 이들과 더불어 살기 위한 새로운 민족의식의 창출이 다인종·다문화 사회를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일 터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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