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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선포 후 옥새는 용 모양, 황제의 나라 표현

중앙선데이 2010.08.15 02:47 179호 10면 지면보기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지요다 1-1번지에 있는 궁내청 서릉부 도서관에서 '조선왕실의궤'를 열람한 것은 5일 오후였다. 4년간 벌여 온 ‘의궤 환수운동’을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서릉부가 소장하고 있는 도서 현황을 최종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궁내청은 일반인 출입이 극도로 제한돼 의궤 열람을 하려면 최소한 보름 전에 ‘허가 신청’을 해야 했다. 열람 목적과 인적 사항을 꼼꼼히 적어 낸 뒤 도서출납계 직원들의 심의를 거쳐 허락이 떨어졌다. 그것도 희망 날짜가 아니라 서릉부 도서관의 편의에 맞춰 시간을 지정한다.

‘빼앗긴 보물’ 조선왕실 의궤, 도쿄 궁내청 도서관에서 열람해 보니

문득 4년 전 일이 떠올랐다. 2006년 10월, 어렵사리 궁내청의 허가를 받아 의궤를 봤던 첫 순간의 전율이었다. 자주색으로 물들인 삼베 표지에는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라고 씌어 있고, 원(原)소장처를 나타내는 ‘오대산’이란 글자가 선명했다. 색을 화려하게 배합해 그려진 갖가지 그림은 1895년 일본인에게 죽임을 당한 뒤 무려 2년2개월에 걸쳐 치러진 슬픈 ‘국장의 기록’들이었다. 이전에 제작된 다른 의궤가 중국식 연호를 사용했던 것과 달리 그 표지에는 중국의 연호가 아닌 ‘개국 504년’이란 조선의 연호를 기재하고 있었다. 전 세계를 향해 우리가 독립국임을 선포하는 ‘자주정신’의 표출이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보인소의궤(寶印所儀軌)'란 책도 눈에 들어왔다. 고종 13년(1876년),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에서 발생한 화재로 조선의 옥새가 소실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고종은 무위소(武衛所)라는 관청에 옥새와 인장을 새로 제조하도록 명령한다. 12월 27일까지 보인 11과(科:개)가 제조돼 고종에게 헌상됐다. 이때의 제작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종합보고서가 '보인소의궤'인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옥새 제작에 관한 유일한 자료다. 우리나라의 ‘대한민국 국새’도 '보인소의궤'에 근거해 제작된다고 한다.

황제 즉위 전엔 거북이 모양 옥새 사용
또 다른 중요한 책으로는 '대례의궤'가 있었다. 1897년 10월 13일 선포된 대한제국의 탄생과 관련된 자료다. 명성황후가 살해된 뒤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다시 경운궁으로 환어(還御)하면서 정국은 안정을 찾기 시작하고 쇠약해진 왕권을 일신(一新)하고자 하는 노력은 대한제국의 선포로 나타났다.'대례의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그림은 황제지보(皇帝之寶), 이른바 국새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었다. 거북이로 ‘조선국 주상지보’의 모습을 담은 '보인소의궤'와 달리 황제를 뜻하는 용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도 당당한 ‘황제국’으로서 세계 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자주 의지의 표출이었다.

그런 내용을 담은 '대례의궤'가 일본 궁내청 왕실도서관으로 이관돼 지금까지 우리 곁을 떠나 있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대례의궤'를 보면서 한 가지 더 가슴 아팠던 것은 ‘조선총독부 장서인’이 모든 페이지에 걸쳐 날인돼 있다는 점이다. 정성껏 그려진 황제지보 옆에 무성의하게 날인된 ‘조선총독부의 장서인’은 일제 식민통치 기간에 훼손된 우리 문화재의 현실을 보여 주는 듯했다.

이런 훼손 행위는 '대례의궤'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도서에 걸쳐 자행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책 표지에 점잖게 소장처를 밝히는 장서인을 찍은 것이 아니라 모든 페이지에 성의 없이 도장을 찍었다. 그 바람에 붉은 인주는 뭉개져 추한 흔적을 남겼고, 앞뒤 페이지까지 번져 버린 경우도 많았다.'가례도감의궤(사진)'의 모습도 기억이 남는다. 이 의궤는 원소장처가 강화부본이라고 표기돼 있는데, 고종 3년 치러진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장면들을 기록한 것이다. 운현궁에서 왕비 수업을 받고 있던 명성왕후를 모시고 창덕궁으로 행차하는 ‘반차도’가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삼베로 만들어진 황색 표지가 오랜 세월의 풍상을 이기지 못해 삭아 가고 있었다. 머나먼 이국 땅의 외딴 창고에서 열람하는 사람조차 없이 사그라져 가는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일본에 의해 훼손된 것은 아니겠지만 몸이 아픈데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외롭게 죽어 가는 생명을 보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고종 결혼식 그린 가례도감 표지 훼손 심해
조선왕실의궤환수위는 당시 반환 종류와 목록을 확정하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궁내청 도서관이 워낙 제한된 공간이다 보니 일본 측에서 자료를 공개하기 전에는 정확한 목록을 확인하기가 불가능했다. 해외전적조사연구회의 2001년 첫 번째 조사에서는 71종이던 것이 조선왕실의궤환수위의 확인 결과 2006년에는 72종, 국립문화재연구소의 2009년 10월 조사 결과로는 76종으로 늘어났다. 우리는 궁내청의 정확한 의궤 목록을 확인하기 위해 일본 국회의원들에게 부탁했다. 그들이 낸 서면질의 결과 올해 4월 궁내청이 확인해 준 의궤의 목록은 81종 167책이었다. 국립문화재가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것보다 5종 13책이 더 많았다.

5일 열람 과정에서 새롭게 확인된 의궤들은 다음과 같다.
◆의왕영왕 책봉의궤=고종의 두 아들 책봉에 관한 기록이다. 고종은 명성황후로부터 황태자인 순종을 얻었고, 후궁 귀인 장씨로부터 둘째 이강(의화군), 후궁 귀인 엄씨로부터 1894년(대한제국 선포) 이은(훗날 영친왕)을 얻었다. 대한제국 선포 후 고종은 황제가 돼 두 아들을 군(君)이 아닌 의왕·영왕 으로 봉하는 의식을 진행한 것이다.

◆순비책봉의궤와 진봉 황귀비의궤=영친왕 이은의 생모인 귀인 엄씨의 책봉에 관한 기록이다. 이은이 책봉될 때 귀인 엄씨도 순빈으로 책봉됐다. 그런데 다음 해인 광무 5년(1901년) 빈을 비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명성황후 사후 아관파천에 동행한 엄비는 영친왕을 출산한 뒤 정치 실세로 등장했고, 순종의 뒤를 이을 황권의 계승권까지 갖게 됐다. 엄비의 위상이 높아지는 과정에서 순빈에서 순비, 황귀인으로 지위가 올라가는 모습이 이 의궤들에 담겨 있다.

◆빈전혼전도감도청의궤=1904년 9월 28일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민씨(1872~1904:민태호의 딸·순종비·훗날 순명황후로 추존)의 국장과 관련된 기록이다. 1882년 궁궐로 들어온 뒤 을미년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살해당할 당시 허리를 다쳐 고질병을 앓았다. 당시 24세였다. 그때의 충격으로 가끔씩 정신이 나간 듯한 모습을 보이다가 급기야 급체로 목숨을 잃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의 사후에 남편 순종이 황제가 됐으므로 순명황후로 추존됐다.

◆화성성역의궤=조선 후기 정조 때 화성(수원) 성곽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의식 등을 수록했다. 채제공(蔡濟恭)이 지휘한 성역소(城役所)에서 사업을 맡아 1796년 9월 공사를 끝낸 직후 의궤청(儀軌廳)이 조직돼 사업에 관한 각종 기록을 정리했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의 화성 행차를 수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내용에 맞춰 수정한 뒤 1801년(순조 1년) 9월에 간행했다. 2007년 7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헌종 때 궁중잔치 설명한 책, 반환 어려울듯
5일 열람에서 우리 일행은 새로 확인한 5종의 의궤가 1922년 조선총독부의 기증으로 일본에 온 것이란 사실을 확인됐다. 이것들은 앞으로 일본이 반환할 도서 목록에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이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바로 '진찬의궤'(1849년 제작) 4책이다. 이 책에는 대정 6년(1917년) ‘궁내청 도서비 구입’이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이는 다른 의궤와 달리 궁내청 도서관이 돈을 주고 구입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의궤는 헌종 재위 기간의 궁중잔치 관련 내용인데 활자본으로 간행돼 다량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는 악기 편성을 그림으로 설명한 것들이 기록돼 있었다. '진찬의궤' 4책은 조선총독부의 기증으로 일본에 간 것이 아니므로 ‘반환 목록’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크다.

그 밖에 조선 왕실 소유를 뜻하는 ‘제실도서지장(帝室圖書之章)’ 날인이 돼 있는 대한제국 시기의 도서들이 궁내청에 상당히 있다. 그러나 이 제실도서들은 총독부에 의해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될 뿐 아직까지 구체적 경위를 확인하지 못했다. 앞으로 우리들이 더 노력해 밝힐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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