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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큰바위 얼굴을 그려내고 싶다”

중앙선데이 2010.08.15 01:43 179호 27면 지면보기
기업인 전문 만화가인 유영수 화백은 “CEO이야기를 통해 아버지가 자녀들과 함께 보고 공감할 수있는 ‘삶의 지혜’를 담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왼쪽은 유 화백이 그린 주요 기업 창업자들의 모습.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박두병 두산그룹 회장,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구인회 LG그룹 회장. 신동연 기자
한국에서 만화를 그린다는 것은 만만찮은 일이다. 허영만 화백이나 돌아가신 고우영 화백 정도 돼야 ‘작가’ 대접을 해줄 뿐이다. 어중간하면 ‘만화쟁이’라는 소리나 듣기 십상이다. 게다가 극화도 아닌 교양만화를 그린다면 상황은 더 나빠진다. 독자들과 만날 기회를 잡기 어려워지고 그만큼 자리잡기도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대기업을 그만두고 전업 만화작가로 나선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유영수(58) 화백은 바로 이런 길을 선택했다. 그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기업 만화가의 길을 걷고 있다.
“기업에서 20년 이상 일하면서 경영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보고 배울 기회가 많았습니다. 이런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전업작가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성공한 기업가, 특히 폐허 속에서 큰 기업을 일군 창업자들의 삶을 돌이켜보면 ‘큰 바위 얼굴’ 생각이 납니다. 제 만화가 ‘큰 바위 얼굴’을 향하는 자그마한 이정표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습니다.”

'CEO이야기'시작하는 유영수 화백


유 화백은 동국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1978년 대한항공에 들어가 전산시스템 개발 등을 담당했다. 공대 출신의 만화가, 특이하다.“초등학교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가정 사정으로 공대에 들어갔지만 미대에서 스케치·드로잉 같은 과목을 도강하면서 만화를 익혔습니다. 동양화 과목에 들어갔다가 담당 교수가 그림을 칭찬하는 바람에 난감했던 기억도 납니다. 회사 다니면서도 간간이 전문지에 만평이나 일러스트 등을 연재하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인 만화 작가로 나선 것은 2002년 직장을 그만두면서부터다. 그는 기업인에 대한 만화를 많이 그린다. 왜 하필 기업 창업자들을 선택했을까.“하도 세상이 급하게 변하다 보니 세대 간에 경험과 생각의 차이가 갈수록 커지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을 일군 창업자들을 통해 당시 상황과 그들이 고민하고 결단하는 모습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같은 시대를 경험한 40, 50대 독자들이 ‘맞아, 그때는 이랬지’라며 무릎을 치고, 젊은 세대는 선대의 도전을 거울삼아 인생의 어려움에 맞서는 힘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시작은 이병철 삼성 회장의 '호암자전'을 택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가지만 정주영 회장과 이병철 회장은 완전히 다릅니다. 정 회장은 천재입니다. 한순간에 핵심을 꿰뚫어보고 결단을 내립니다. 건설을 시작으로 조선·자동차 등에 뛰어들어 성과를 일궈내는 모습을 보면 번개가 내리치는 듯합니다. 대단한 분이지만 일반인들이 뒤를 따르기에는 너무 험난한 길이라고 느꼈습니다. 이 회장은 꼼꼼한 수재라고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부지런히 정보를 모으고 빈틈없이 허실을 판단한 다음 갈 길을 정합니다. 냉철한 판단을 거쳐 모든 사람이 반대한 반도체 산업에 진출한 사례에서 그 진면목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를 사는 사업가나 회사원 모두가 ‘나도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오를 수 있다’며 올려다보는 큰 산봉우리와 같은 분입니다.”

하지만 호암의 일생을 연대기식으로 나열하는 방식은 아니다. 현재 상황과 호암의 일화를 연결해 경제·경영 지식과 더불어 생각해 ‘삶의 지혜’를 아우르려 한다. 특히 아버지가 젊은 자녀와 함께 보면서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다.

“창업자들을 보면 학력은 다를지라도 가정교육을 잘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요즘은 머리 좋고 학교에서 공부만 잘해서 출세한 사람도 가정교육의 기반이 튼튼하지 못하니 성희롱 등으로 단번에 무너지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옛 사람들이 어떻게 했나를 통해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호암의 사례를 보면서 40, 50대 독자들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녀에게 삶의 지혜를 전달해 줄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유 화백은 대한상공회의소 협찬으로 정주영 현대 회장, 구인회 LG 회장, 최종건 SK 회장, 박두병 두산 회장 등의 일대기를 만화로 제작했다. 상의 사이트에 연재한 뒤 10만 부씩 인쇄해 전국 초·중·고교와 도서관에 배포했다. '만화 고사성어''핑핑 만화 영문법(초등학생용)'같은 교육 만화도 그렸다. 핑핑 영문법은 현재 태국에서 번역출판됐다. 올해에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만화로 내놓아 인기를 끌고 있다. 그는 지금도 붓으로 그림을 그린다. 펜 만화처럼 강렬한 맛은 덜하지만 부드러운 선으로 여백의 미를 살려 독자가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긴다는 평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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