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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묻은 다음 날, 노론은 역사를 되돌리기 시작했다

중앙선데이 2010.08.15 01:39 179호 28면 지면보기
다산 초당 정약용이 18년간 유배 생활을 한 전남 강진의 만덕산 기슭에 있다. 정약용의 일가는 정조 사후에 사형당하거나 유배를 당해 폐족 신세가 된다. 사진가 권태균
최근 정조가 노론 벽파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이 공개되면서 일부 학자는 ‘심환지와 노론 벽파는 정조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 ‘정조 독살설은 시골에서나 떠돌던 야담’이라고 주장했다. 정조는 재위 24년(1800) 6월 28일 사망하는데 그달 15일 심환지에게 “나는 뱃속의 화기(火氣)가 올라가기만 하고 내려가지 않는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쓴 것이 유언이라고도 주장했다. 이런 주장들은 그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노론 벽파의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본 결과 발생한 일들이다.

성공한 국왕들 정조⑪ 정조 독살 의혹

정조의 6월 15일 편지가 유서라는 주장에 대해 살펴보자. 정조가 다음 날(6월 16일) 격한 어조로 대대적인 정치개혁을 시사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유서 운운은 설 곳이 없다. 정약용의 연보인 '사암선생연보'에는 정조가 6월 12일 밤 규장각 아전을 정약용에게 보내 “(이달) 그믐께면 들어와 경연에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유언은커녕 6월 말께면 정약용 등 남인을 대거 등용하는 정치개혁을 구상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시골 사람들만 독살설을 말하고 한양 사람들은 말하지 않았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1800년 7월 4일 순조 즉위 당일 사헌부·사간원에서 정조 사인(死因)에 의혹이 있다면서 어의(御醫) 처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래서 한양 사람들은 정조 독살설을 말하지 않았다는 말 역시 자의적임을 말해 준다.

이때 강명길(康命吉)과 함께 공격받은 어의가 ‘방외의(方外醫: 의서에 없는 처방을 하는 의사)’ 심인이었다. 정순왕후가 7월 13일 “약에 대해 의논한 시종을 내가 알고 있으니 어찌 그들에게 죄를 줄 수 있겠는가?”라고 처벌을 거부하자, 대사간 유한녕(兪漢寧)은 ‘역의(逆醫: 역적 의사)’라는 표현을 쓰면서 ‘흉적 심인의 죄는 신가귀(申可貴)보다 더하다’고 공격했다. 신가귀는 효종에게 침을 놓다가 ‘혈락(血絡: 혈관)을 범해’ 사망했다는 이유로 사형당한 유일한 어의였다. 신가귀보다 심인의 죄가 더 크다는 것은 심인이 정조를 독살했다는 공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정순왕후와 심환지 등이 심인을 비호한다는 비난이 들끓자 정순왕후는 심인을 경흥(慶興)으로 유배 보냈으나 7월 15일에는 관학 유생 권중륜(權中倫) 등이 심인의 처형을 요구하고 나서는 등 소동은 가라앉지 않았다. 한양이 조용하기는커녕 정치엘리트인 양사와 성균관 유생들이 사인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 연일 시끄러웠다. 그만큼 정조 사인에 대한 의혹이 팽배했다. 파문이 점점 커지자 정순왕후는 7월 20일 “인심의 분노는 막기 어려워 물정(物情)이 점점 격렬해지니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심인은 순조 즉위년 8월 10일 유배지로 가는 도중 사형당했다.

(왼)유문도(惟門圖) 정조가 묻힌 건릉의 조성 과정을 기록한 정조건릉산릉도감의궤에 있다. (오)이가환의 필적 남인 소장파의 영수였던 이가환이 쓴 글씨.
그러나 사인(死因) 규명을 위한 국문은 끝내 거부해 의혹은 가시지 않았다. '순조실록'의 사관(史官)은 이때 “대신 심환지는 심인의 소원한 친족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비호하려고 했었다”면서 심인의 배후가 심환지라는 세간의 의혹을 실었다. 그때 어떤 이가 심환지에게 이가작(李可灼)과 방종철(方從哲)을 거론하면서 뒷날 죄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하자 사형에 동의했다는 것이다. 이가작은 명나라 광종(光宗)에게 붉은 환약〔紅丸〕을 올려 급서하게 만든 인물이고 방종철 역시 이 사건 관련 인물인데 이를 ‘붉은 환약의 안건〔紅丸案〕’이라고 부른다. 심환지가 어의로 진출시켜 정조를 치료케 했던 어의가 심인이고, 그를 지휘했던 내의원 제조가 심환지였으므로 의문은 더해 갈 수밖에 없었다.

심인이 사형당한 닷새 후인 그해 8월 15일에는 경상도 인동부(仁同府: 현 구미시)에서 장시경(張時景)·현경(玄慶) 부자가 고을 농민들을 모아 ‘선왕의 복수’를 명분으로 인동 관아를 습격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지금 국가에 어약(御藥)을 과도하게 사용해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게 되었다”고 정조 독살설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며 관아를 습격했다. 그러나 서울 공략 계획이 실패하자 장시경 3형제는 천생산성(天生山城)의 낙수암(落水巖) 위로 올라가 “군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먼저 죽는 것이 억울하다”며 몸을 던졌는데 막내 장시호는 낭떠러지에 떨어져서도 살아남았다. 인동부사 이갑회와 경상감사 김이영의 보고를 들은 조정은 크게 놀라 형조판서 이서구(李書九)를 영남안핵사(嶺南按<8988>使)로 삼아 현지에 급파했다.

명가 후예들이 ‘선왕의 복수’를 명분으로 관아를 습격한 대사건에 대해 노론 벽파가 장악한 조정은 쉬쉬하기에 바빴다. 9월 23일 영의정 심환지는 정순왕후에게 건의해 장시호를 비롯한 3명만 사형시키고 김금돌 등 8명은 유배 보냈고 손둘엄(孫<4E67>嚴) 등 33인은 곤장을 친 후 석방했다. 장시호 등은 서울로 압송해 국문한 후 공개적으로 형을 집행해야 했으나 심환지는 ‘해도(該道: 경상도)에서 법을 적용해도 된다’면서 경상도에서 사형시켰다. 그래서 ‘선왕의 복수’를 주창하며 관아를 습격한 대사건은 다른 역모 사건들과는 달리 비밀리에 처리되었고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다. 그만큼 정조 독살설은 정순왕후나 심환지, 즉 노론 벽파의 아킬레스건이었다.

그러나 정조 독살설은 사후 1년이 지난 순조 1년(1801) 5월에도 홍문관 부교리 이인채(李寅采)가 “작년 여름 망극(罔極)한 변을 당했을 때 진실로 조금이라도 상도(常道)를 지키려는 마음이 있는 자라면 그 누군들 역적 심인을 직접 칼로 찌르고 싶어 하지 않았겠습니까?(순조실록 1년 5월 17일)”라고 주장할 정도로 가라앉지 않았다. 정순왕후는 순조 3년(1803) 1월 “죄는 오로지 심인에게 있었다”라고 변명할 정도로 정조 사인에 대한 의혹은 계속되고 있었다.

정조가 죽자마자 정권을 독차지한 노론 벽파는 정조의 24년 치세를 무효로 돌리는 ‘역사 거꾸로 세우기’에 착수한다. 심환지가 정조 독살 혐의에서 벗어나려면 이 ‘역사 거꾸로 세우기’에 맞서다 조금이라도 정치적 불이익을 당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심환지는 과연 어떠했는가? 정조의 시신이 11월 6일 사도세자 곁에 묻히고 11월 7일 국장도감이 귀경한 다음 날부터 노론 벽파가 주도하는 ‘역사 거꾸로 세우기’가 시작되어 이듬해(경신년∼신유년)까지 계속된다.

이가환·이승훈·정약종 등이 사형당하고 정약용 형제 등이 유배형에 처해지는 정치보복이 모두 이때의 일이다. 그런데 순조 2년(1802) 10월 세상을 떠난 심환지의 졸기는 “경신년과 신유년 사이의 참륙(斬戮: 사형)과 찬축(竄逐: 유배)의 모든 큰 형정(刑政)은 그가 맡아 결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라고 씌어져 심환지가 ‘역사 거꾸로 세우기’의 주역이라는 사실을 전하고 있다.

정순왕후가 순조 5년(1805) 세상을 떠나면서 순조 6년(1806) 노론 벽파에서 노론 시파라는 당내 다른 계파로 정권이 이동하는 이른바 병인경화(丙寅更化)가 발생하는데 이때 사간원 정언 박영재(朴英載)는 심환지의 죄상을 열거한다.

“(심환지가) 역적 심인을 추천해 (어의로) 진출시킨 것이 첫 번째 죄입니다…장용영 창설은 선대왕(先大王: 정조)의 심원(深遠)한 생각에서 나온 것인데 감히 3년 만에 고쳐도 된다는 이야기를 방자하게 진달했고…('순조실록' 6년 3월 3일)”
‘심환지가 역적 심인을 천거해 어의로 진출시킨 것이 첫 번째 죄’라는 말은 정조 독살의 배후가 심환지라는 폭로에 다름 아니다. 심환지는 또한 순조 2년(1802)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기른 조선 최고의 군영 장용영을 해체했다. 공익(公益)보다 사익(私益), 국익(國益)보다 당익(黨益)을 앞세우는 심환지와 노론 벽파의 정치관을 잘 말해 준다. 장용영 때문에 군사 쿠데타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심환지가 선택한 접근 방식이 편지교환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순조 6년(1806) 4월 삼사(三司)는 합동으로 상소를 올려 “심환지는 선조(先朝: 정조)의 망극한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선왕께서 선향(仙鄕: 저승)으로 멀리 떠나가시던 당일로 우리 선왕의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선왕과 배치(背馳: 어긋남)되었으며…('순조실록' 6년 4월 1일)”라고 심환지가 정조의 배신자라고 공격했다. 그래서 심환지는 이미 죽었지만 선왕의 역적으로 인정돼 관작이 추탈되었고 그 자식들은 사방으로 나뉘어 정배되었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쓴 '>고금도 장씨녀에 대한 기사(紀古今島張氏女子事)'는 관아습격 사건을 주도했던 장씨 남성들이 사형당한 뒤 이에 연루돼 고금도로 유배를 갔던 부녀자들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 쓴 글이다. 정약용은 여기에서 장시경의 입을 빌려 “시상(時相: 심환지)이 역의(逆醫) 심인을 천거해 독약을 올리게 시켰다”라고 썼다. 정조 독살설은 정조 승하 당시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일종의 상식이었다.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조선은 멸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 때문에, 200여 년의 세월을 뚫고 정조의 개혁 정치를 되새기며 독살설의 책임을 묻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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