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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잔혹극

중앙일보 2010.08.13 19:48 종합 31면 지면보기
14번의 살인. 성폭행과 생매장. 신체 절단과 인육 먹기.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1590년대 초반에 쓴 걸로 알려진 희곡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Titus Andronicus)』의 내용이다. 로마 장군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가 휘말린 핏빛 복수극 얘기다. 97줄에 한 번꼴로 잔인한 내용이 등장해 한 평론가는 ‘폭력의 카탈로그’라고 불렀다고 한다. 셰익스피어의 유일한 잔혹극인 이 작품은 『오셀로』와 『리어왕』에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고매한’ 셰익스피어가 썼다고 보기엔 너무 심해 T S 엘리엇은 “지금까지 나온 희곡 중 최악”이라고 평했다나. 하지만 당대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19세기 빅토리아 왕조 시대에도 잔혹극은 눈에 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할리우드 영화로도 히트한 ‘스위니 토드’도 그중 하나다. 당시 런던 시민들이 즐겨 읽던 1펜스짜리 잡지에 소개됐다. 아내를 법관에게 빼앗긴 이발사가 복수심에서 살인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손님들의 목을 딴 후 기계장치 의자로 시체를 아래층으로 떨어뜨린다. 밑에서 기다리던 제빵사는 시체로 고기파이를 만들어 판다. 무차별 살인에 심취해 점차 인간성을 잃어가는 이발사의 모습은 괴물 그 자체다.



잔혹극은 최근 영화나 연극·소설 마케팅에서도 즐겨 쓰이는 단어다. 코믹잔혹극·잔혹로맨스·잔혹동화 등으로 쓰임이 다양하다. 원래는 프랑스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가 주창한 실험연극의 개념이다. 그는 잔혹함의 인식을 통해 인간성 회복과 치유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극에 달한 잔혹함을 경험할 때 영혼의 정화작용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잔혹함이 잔혹함만으로 그친다면 얘기가 다르다. 최근 김지운 감독의 영화 ‘악마를 보았다’가 잔인함이 지나친 몇 장면 때문에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에 청소년 관람불가로 12일 개봉했지만 논란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이병헌)이 약혼녀 살인범(최민식)을 단죄하기 위해 그의 아킬레스건을 끊거나 쇠꼬챙이로 양 볼을 찔러 관통시키고 나중엔 참수(斬首)까지 하는 장면은 두 눈 뜨고 보기 쉽지 않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사형(私刑)은 16세기에도 19세기에도 있었다.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를 비롯한 ‘잔혹한’ 요즘 한국영화를 보면서 인간성 상실에 대한 비애를 느낄 수 없는 이유는 뭘까. 잔혹극의 본질을 추구하기보다는 시청각적 묘사에만 너무 집중해서인 건 아닐까. 





기선민 문화스포츠 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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