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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균의 광복65년 분단65년] 비극의 씨앗 ‘얄타 회담’ 현장을 가다

중앙일보 2010.08.13 01:41 종합 12면 지면보기
1945년 2월 얄타 회담 때 스탈린이 내준 리바디아 궁전의 루스벨트 집무실. 사진 속 모습대로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이곳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과 대가에 관한 밀약을 했다. 한반도의 신탁통치 문제도 거론됐다.


얄타(Yalta)는 이중적이다. 겉 인상은 온화하다. 크림반도 흑해 연안의 아름다운 휴양지. 8월의 뜨거운 햇살 속에서 도시는 아늑해진다. 흑해의 색깔은 이름과 다르다. 검지 않고 진한 푸른빛 바다다.

65년전 루스벨트·스탈린이 한반도 운명 가른 곳…얄타에는 역사의 대반전 드라마가 있었다



얄타의 속내는 자극적이다. 그 역사 이미지는 회색 빛의 격렬함이다. 얄타 회담은 음모와 위선의 냄새를 담고 있다. 한민족 분단의 씨앗도 뿌렸다. 얄타체제는 냉전의 상징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옛 소련의 몰락과 함께 해체됐다. 하지만 그 잔재는 한반도에 질기게 남아있다. 얄타는 인구 8만5000명의 작은 항구. 우크라이나의 크림자치공화국 내에 있다. 옛 소련 영토였을 때 모스크바 크렘린 지도자들의 휴양지였다. 지금도 우크라이나 사람보다 러시아인이 많다.



제2차 세계대전 마지막 해인 1945년 2월. 그곳에 연합국의 최고지도자 세 명이 모였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미국 대통령), 이오시프 스탈린(소련 최고인민위원장·대원수), 윈스턴 처칠(영국 총리), 빅3다. 지난주 나는 크림반도의 심페로폴(Simferopol)공항에 내려 얄타로 들어갔다.



회담 장소는 그대로였다. 리바디아 궁전(Livadia Palace). 1911년 9월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지었다. 네오 르네상스식 흰색 2층(탑은 3층). 황실의 여름 별장이었다. 지금은 박물관이다. 그때 로마노프 왕조는 황혼기였다. 건물의 위용과 화려함은 떨어진다. 하지만 100년 된 흰색 건물은 푸른 바다와 어울리면서 한 폭의 풍경화로 바뀐다.



리바디아 궁전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1911년 건립했다. 얄타회담 장소로 쓰였다.
궁전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는 것은 옛 소련 군복차림의 마네킹이다. 그리고 화이트 홀이다. 본회담장으로 쓰였다. 크기는 218㎡(66평). 당시처럼 꾸며놓았다. 원탁 테이블 위에는 세 나라 국기가 꽂혀 있다. 빅3 명패가 있다.



루스벨트(당시 63세)·스탈린(66세)·처칠 (71세)-. 그들의 치열한 권력 의지, 노회한 대중 동원, 원숙한 비전 설파는 경지에 이르렀다. 개인적 삶도 곡절과 파란을 겪었다. 그런 3인이 모였다. 테이블을 둘러싼 의자는 18개.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미국 국무장관)·뱌체슬라프 몰로토프(소련 외교인민위원)·로버트 이든(영국 외상)을 비롯해 외교 참모·군 장성들이 빅3 옆에 촘촘히 앉았다. 그 모습이 사진으로 액자 속에 있다. 그 장면은 타임머신으로 내게 작동했다. 역사 전개의 굉음(轟音)이 들리는 듯했다.



그들은 전후 세계의 새 판을 짰다. 패전을 앞둔 독일·일본의 공백을 어떤 형태로, 어떤 나라가 메울 것인가-. 목표는 평화의 세계 질서 구축이었다. 하지만 영향력과 실리 확보를 놓고 충돌했다. 흥정과 의심, 회유와 압박, 설득과 배신이 테이블 위에서 교차했다. 그때 히틀러의 독일은 몰락하고 있었다. 동부전선의 소련군은 파죽지세였다. 베를린 공격을 서둘렀다. 반면 서부전선의 미·영군은 벨기에 전선에서 주춤했다.



리바디아 궁전의 화이트 홀 원탁. 이곳에서 3국정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질서의 새 판을 짰다. 당시 루스벨트·처칠·스탈린은 외교보좌관·장성들을 대동했다(위). 회담장소인 리바디아 화이트 홀의 현재 전시 모습(아래).
첫 회담은 4일 시작했다. 그리고 8일간 협상 게임이 시작됐다. 회담 시작은 보통 오후 4시에. 스탈린은 밤에 일하는 스타일이다. 셋째 날부터 핵심 의제인 폴란드와 유엔 투표권 문제를 놓고 격론을 벌였다. 처칠은 스탈린의 동유럽 지배 의도를 경계했다. 루스벨트는 스탈린과의 협조 가능성을 확신했다. 그는 정직한 중재자로 처신했다. 하지만 폴란드에 친소 루블린 동맹을 중심으로 신정권을 세우기로 했다.



그곳 안내책자에 이런 부분이 있다. “크림 회담(얄타 회담) 결과는 공정(fair)했다”-. 그 표현은 반감을 일게 한다. 그곳에서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에 있는 소련사 담당 고교 교사를 만났다. 그에게 물었다. “루스벨트의 선의와 양보가 지나쳤다. 폴란드는 얄타의 희생양 아닌가.”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루스벨트(오른쪽)와 스테티니어스 국무장관. 루스벨트는 회담 두 달 뒤 숨진다(위). 음모의 대가들인 스탈린(오른쪽)과 몰로토프.
“2차대전 연합국 주연의 우선순위를 따지면 소련이다. 소련군 전사자 수는 760만. 미군 전사자의 26배, 영국 전사자의 19배다. 서부전선은 동부전선(독·소전)에 비해 참상과 잔혹함이 덜했다. 그 비극의 덩치와 승리의 크기에 맞게 대가와 전리품이 분배되었다.” 그는 “그 무렵 소련군은 동유럽을 평정하고 베를린에 가장 가까이 갔다. 스탈린이 협상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했다. 동유럽은 소련의 영향력에 들어갔다. 역사는 현장의 실질적 힘으로 작동한다. 루스벨트는 타협했다. 양보했다기보다 최선의 현실적 선택을 한 것이다”고 말했다.



2월 8일 저녁 만찬이 있었다. ‘차르(황제)의 와인’이라는 얄타의 마산드라 포도주가 나왔다. 우호적 분위기였다. 루스벨트는 “우리가 모인 목적은 세계 모든 사람의 안전과 행복의 실현을 제공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음 날 세 거두는 궁전의 안쪽 정원으로 나왔다. 카펫 위 의자에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은 현대사의 가장 강렬한 장면으로 남아있다. 사진 속 스탈린은 득의의 미소를 슬며시 드러낸다. 루스벨트는 초췌한 모습이다. 여독(旅毒)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워싱턴에서 네 번째 대통령 취임식을 끝낸 뒤 얄타로 향했다. 군함(순양함 퀸시)과 수송기를 번갈아 탔다. 그는 고혈압·심장 확대증을 앓고 있었다. 장기여행은 건강을 악화시켰다.



스탈린은 그런 루스벨트를 위해 궁전 안에 침실·집무실을 마련해주었다. 스탈린은 자신과 처칠의 숙소를 근처 다른 곳에 잡았다. 그 집무실 전면의 사진이 나의 시선을 묶어둔다. 루스벨트와 스탈린의 모습이다. 두 정상이 앉았던 소파·책상이 사진 속 형태대로 놓여 있다. 그 장면대로 두 정상은 별도 회담을 열었다. 처칠을 빼고 두 번 만났다. 일본 문제를 놓고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댔다. 밀실 흥정에 들어갔다.



그때 일본군은 절망적인 옥쇄(玉碎) 돌격을 계속했다. 미군은 이기면서도 희생이 많았다. 미군은 일본군의 전력과 항전의지를 과대 평가했다. 일본 본토 상륙 때 100만의 사상자를 낼 것으로 추정했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을 요청했다. 조기 종전의 목표는 루스벨트를 초조하게 했다.



두 개의 다른 사진이 나를 상념에 빠지게 한다.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찍힌 사진. 음모와 흉계의 대가들이다. 다른 사진은 피곤한 루스벨트와 매너 좋은 얼굴의 스테티니어스. 루스벨트는 최고의 정치 프로였다. 뉴딜로 대공황을 극복했다. 하지만 그때는 허약해져 있었다. 특유의 낙천적 미소는 줄었다. 대조적인 표정의 그 두 사진은 긴박한 심리전의 협상 게임에서 미국이 밀렸을 것이라는 인상을 준다. 스탈린은 군복(대원수)을 입었다. 처칠도 군복차림이었다. 루스벨트는 신사복이었다. 하지만 건강 악화는 문민 우위의 이미지를 과시하지 못했다.



스탈린은 역사 회복의 야심을 갖고 있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포츠머스 회담(1905년 9월 미국 뉴햄프셔) 때 잃은 권리를 회복하려 했다. 그는 40년 전 러일전쟁 패배의 수모를 잊지 않았다. 그는 루스벨트의 강박감을 최대한 활용했다. 오판과 실수를 유도했다. 스탈린은 루스벨트의 요청을 넌지시 받아들였다. 독일 항복 2~3개월 후 만주에서 참전할 것을 약속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대가를 챙겼다. 밀약은 “일본의 배신적(treacherous) 공격으로 침해된 러시아의 옛 권리는 회복돼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 자리에서 한반도 얘기가 나왔다. 신탁통치(trusteeship) 문제가 빅3 회담에서 처음 언급된다. 루스벨트는 피식민지 국가의 자활 능력을 의심했다. 루스벨트는 5년 이상의 한반도 신탁기간을 거론했다. 그는 한국의 왕조사 저력과 국민적 역량을 몰랐다. 스탈린은 이 문제에 관심이 적었다.



2월 10일 공식 테이블에서 소련의 대일전 참전 문제는 통과됐다. 처칠은 수용했다. 전쟁으로 쇠약해진 영국의 발언권은 약했다. 하지만 신탁통치 문제만은 강경했다. 그 대상에서 영국 식민지를 빼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반발했다. 독일·일본의 식민지(한반도)만 적용하는 것으로 조정된다.



그 후 스탈린은 밀약대로 참전한다. 일본의 항복 선언 불과 엿새 전인 8월 9일이다.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직후다. 소련은 태평양에서도 승전국 지위를 획득한다. 거의 무임승차했다. 사할린 남부를 되찾고 쿠릴 열도를 차지했다. 만주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했다. 스탈린의 성취는 소련 외교의 금자탑으로 평가되었다. 소련군은 38도선 개성까지 진출했다. 한국은 전범국 독일처럼 분단된다.



두 사람이 앉았던 소파 앞에서 나는 착잡해졌다. 루스벨트의 오판과 강박감이 없었다면 한반도 역사는 달라졌을 것 아닌가. 그는 스탈린의 야심과 의도를 파악하는 데 미숙했다. 남북한 분단은 없었을 것이다. 온전한 상태로 8·15 독립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가정은 무의미하다.



2월 11일 낮 12시15분 빅3가 모였다. 회담 중 식당으로 사용한 영국식 당구장에서다. 조약에 서명했다. 그리고 다음 날 동시에 발표했다. 대일 참전 의정서는 비밀에 부쳤다.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조약에서 멀어져갔다. 폴란드는 친공 정권으로 굳어졌다. 루스벨트는 “소련의 변화가 불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약의 협조정신을 믿으려 했다. 그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다. 4월 12일 숨졌다. 얄타 회담 두 달 후다.



역사는 역전과 반전(反轉)의 드라마다. 얄타 회담에서 그런 드라마의 주인공은 스탈린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극적 반전은 리바디아 궁전에 있었다. 궁전 2층은 니콜라이 2세의 박물관이다. 그가 쓰던 가구·그림·사진들이 전시돼 있다. 흰색 피아노는 아나스타샤 공주의 비운의 삶을 간직한 듯하다.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으로 황제 가족은 1918년 처형당했다. 소련 붕괴 뒤 2000년 그들은 러시아정교회의 성인(聖人)으로 추대되었다. 궁전 뒤에 작은 교회가 있다. 이런 글귀가 적혀 있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여라. 황제는 러시아의 성인이었다” 그 글귀는 잔인한 숙청과 통제의 스탈린 역사를 무너뜨린다.



반전은 미국에서도 있었다. 2005년 종전 60년 행사 때 당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연설에서다. 부시는 “얄타는 수백만 명의 유럽인들을 스탈린 공산당 지배하에 희생시킨 독·소 불가침 조약의 불의(不義·unjust)한 전통을 답습했다. 강대국 간 협상에 약소국의 자유가 소모품으로 희생됐다”고 말했다. 루스벨트의 역사적 자존심은 상처 입었다.



리바디아 궁전 전면에 서 있는 푯말. 회담 6일째 날궁전 안쪽 정원에서 찍은 빅3의 역사적 기념사진이다. 스탈린·루스벨트·처칠(오른쪽부터).
진정한 반전의 주인공은 한국과 한국인이다. 65년 전 빅3가 형편없이 무시하던 후진국 한국. 하지만 전후 110여 개 신생국 중 산업화와 민주화를 성취한 유일한 나라는 한국이다. 흑해 연안에도 삼성·LG·기아자동차의 광고판이 걸려있다.



한반도는 요동친다. 그것은 지정학적 숙명이다. 얄타의 주술은 남아 있다. G2 시대다. 퇴장한 러시아의 공백을 중국이 차지했다. 얄타의 밀약은 미·중 사이에서 재현될 수 있다. 북한 체제의 급변 사태 때다. 부국강병(富國强兵)만이 한반도 장래의 모호함을 퇴출시킨다. 비전과 용기의 리더십, 똑똑한 국민만이 그 불확실성을 제거한다.



박보균 기자(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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