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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52) 야전복으로 갈아입다

중앙일보 2010.08.13 01:34 종합 10면 지면보기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를 비롯한 육사 8기생의 만남이 숙성(熟成)의 단계로 접어드는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그런 자리에서 만남을 시작했고, 역사를 논했을 것이고, 때로는 그 역사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으려는 꿈을 꿨을 것이다.


“낮엔 대한민국, 밤엔 인민공화국” 지리산으로 들어가다

숙군도 끝을 맺었다. 거듭 말하지만, 그 숙군 작업은 대한민국 군대의 기틀을 잡아 세우는 일이었으며 그를 제대로 매듭짓지 못했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거대한 작업에 신명을 다 바쳤던 당시 정보국의 동료 요원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어느덧 여름이었다. 아주 무덥던 날로 기억한다. 이범석 국방부 장관이 나를 느닷없이 호출했다. 38선은 계속 북한군의 준동으로 출렁이기 일쑤였고, 여수와 순천에서 벌인 14연대 반란 사건의 잔당 세력들이 지리산에서 계속 대한민국의 치안을 흔들고 있던 상황이었다.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14연대 반란 사건 뒤 좌익 주동 세력은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펼쳤다. 이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 일대의 치안 상황은 불안했다. 1949년 3월 담양·순창 경계지점에 경찰이 써붙인 ‘경비만전, 안심하고 오십시요’라는 팻말이 눈길을 끈다. 유명 종군작가 고 이경모씨의 작품으로 『격동기의 현장』(눈빛)에 수록된 사진이다.
매일 반복되는 업무에 묻혀 있다가 이범석 장관의 호출을 받은 것이었다. 집무실에 들어서자 이 장관은 “백 대령, 정보국 업무가 자네 적성에 맞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떨떠름했다. 한창 바쁜 정보국 업무 사정은 장관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정보국 업무가 내 성격에 맞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나는 무슨 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을 말하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을 했다. 국군 내부에 침투해 있던 좌익들을 모두 솎아내는 숙군 작업도 끝맺음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천성(天性)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무골(武骨)로서의 성향이 강한 사람이다. 북쪽에서 태어난 말은 북풍(北風)을 향해 머리를 돌린다고 했다. 정보 업무에 파묻혀 1년 이상을 책상에서 버텼지만 이제 군복을 차려입고 투구를 매만지는 야전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는 “중요한 업무를 마쳤으니 이제는 일선 부대로 가서 지휘를 해 보고 싶다”는 의견을 이범석 장관에게 피력했다. 그는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나는 장관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내 후임으로 오는 이용문 대령이 정보국장 자리를 강력하게 희망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다. 강태무·표무원 2개 대대의 월북 사건으로 경질된 이응준 육군 총참모장의 후임으로 온 채병덕 장군이 연락을 해왔다. “광주의 5사단장으로 갈 생각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군말 없이 “좋다”고 대답했다. 이어 1949년 7월 30일자로 나는 광주의 5사단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정보국 업무를 1년 이상 한 셈이었다. 숙군이라는 중대한 작업을 해오느라고 책상 위의 서류더미에 묻혀 지냈지만 나는 늘 군인으로서 ‘잘 싸우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군문(軍門)에 들어선 뒤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주제였다.



광주의 5사단은 다른 지역 사단에 못지않게 중요한 곳이었다. 여수와 순천에서 벌어진 14연대 반란 사건 이후 그 잔당(殘黨)들이 지리산 지역에 숨어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벌이며 대한민국 남부의 치안을 뒤흔드는 시점에서 5사단은 그들의 진출입(進出入) 요로를 막고 근거지를 소탕해야 하는 임무를 띤 부대였다.



나는 서울역에서 기차 편으로 광주를 향해 떠났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마침 가뭄도 심각해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별로 넉넉지 않아 보였다. 기차에 앉아서 광주까지 내려가는 동안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다. 전임 5사단장은 송호성 장군이었다. 그곳에 도착해 송 장군과 임무를 교대했다. 사단 참모장은 육사 2기생인 석주암 중령이었다. 그는 나중에 6·25가 벌어진 뒤 나와 함께 1사단에서 사단 참모장을 한 인물이다.



석 참모장은 수인사를 마친 뒤 내게 의미심장한 말을 꺼냈다. “사단장님, 잘 아시겠지만 광주는 그냥 앉아서 시간을 보내서는 곤란한 곳입니다. 그저 아무 일 없이 시간만 보내다가는 성공해서 올라가기 힘듭니다.” 석 참모장의 말에는 무게가 실려 있었다.



광주를 비롯한 전남·북 일대는 지리산 빨치산의 활동으로 사실 편한 날이 많지 않았다. 지리산 산간 마을과 인근 지역에는 밤낮없이 빨치산이 출몰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광주 등 대도시 지역에도 가끔씩 그들이 출몰하면서 때로는 심각한 상황이 빚어지곤 했다.



지리산 산간 마을은 아예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치하”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또 빨치산이 그렇게 활동하는데도 이에 대응하는 국군의 성과는 변변치 않았다. 그들이 출몰하는 지역에 출동하지만 늘 그에 앞서 빠져나가는 빨치산들에게 골탕을 먹곤 했던 상황이었다.



성과는 없었고, 피해 상황은 계속 늘어만 가는 형국이었다. 5사단의 예하 3개 연대 모두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해방 정국 이후 줄곧 신경전을 벌이면서, 때로는 무력충돌까지 빚었던 군과 경찰의 관계도 좋지 못했다.



일단 나는 사단장에 부임한 뒤 이런 문제점들을 먼저 점검해 봤다.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피해는 계속 늘어가고, 경찰과의 관계는 썩 좋지 못했다. 나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전투를 수행해야 성과를 올릴 수 있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14연대 반란 사건 때는 작전을 직접 지휘하는 신분이 아니었다. 정보국장으로서 전황을 챙기고 전투 계획을 짜는 데 머물렀다. 이제는 직접 지리산의 적들과 대면하면서 전투를 치러야 할 차례였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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