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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의 시시각각] 한·일 합병, 우리끼리 따로 할 얘기

중앙일보 2010.08.13 00:26 종합 34면 지면보기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사흘 전 발표한 한·일 병합 100주년 담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병합의 강제성을 우회적으로 인정한 대목이었다. ‘3·1독립운동 등의 격렬한 저항에도 나타났듯이, 정치적·군사적 배경 하에 당시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反)하여 이루어진 식민지 지배에 의해 국가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나는 이 문장이 간 나오토 정권의 의지와 한계, 그리고 현 일본 정치권의 수준과 판세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담화가 병합조약이 “무효 또는 원천 무효(불성립)였다”고 깨끗하게 선언하지 못한 것은 우파의 반발, 뒤따를 대규모 배상 문제, 북한과의 수교협상 시 선례가 될 가능성, 학계 일부의 이견 등을 복합적으로 고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는 궤변으로 느껴지지만 운노 후쿠주(海野福壽)·사카모토 시게키(坂元茂樹) 같은 일부 일본 학자들은 한국 병합이 침략적이지만 국제법적으로는 적법하다는, 이른바 ‘부당·합법론’을 주장한다.



예상대로 한·일 양국에서 담화에 대한 비판이 일고 있다. 특히 병합조약의 원천 무효에 대해서는 양국 지식인들이 공동성명을 발표할 정도로 당연해 보이는데도 일본은 결국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아마 두고두고 양국 간 현안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일본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끼리, 우리 한국인끼리 따로 나눌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과거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는 잊을 수도 없고, 앞으로 영원히 잊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식민지로 전락한 가장 큰 책임은 침략자인 제국주의 일본에 있다. 이것이 대전제다. 그러나 그 다음 문제, 우리 내부의 책임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하지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도대체 얼마나 약했기에 남에게 나라를 통째로 먹힐 지경에 이르렀는가. 사람이라면 누가, 시스템이라면 어떤 잘못된 제도가 그토록 약해빠진 나라를 만들었나. 그런 100년 전 한국을 심각하게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전문가는 물론 일반 시민 차원에서도 치열한 자문자답과 자책(自責), 원인 규명 노력이 있어야 다시는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힘이 생긴다고 믿는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망국 당시의 지도층과 을사오적(乙巳五賊) 등 소수 친일파에게 책임을 묻고 나머지 책임은 모두 제국주의 일본에 떠넘기면 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조선 후기 정계를 주름잡은 노론(老論) 일파의 책임이 크다는 주장도 있었다. 과연 일본이나 이완용에게 돌 던지는 것으로 원인 규명이 끝나는 것일까. 어떤 나라든 망하기 전에는 반드시 내부에 망국의 요인이 쌓여 있게 마련이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어떤 요인이 나라를 약골로 만들었을까. 왜 일본·청·러시아가 경쟁적으로 넘보게 됐을까. 일본의 침략사를 연구하는 것 못지않게 우리 내부의 병상일지(病床日誌)도 한층 정밀하게 파헤칠 필요가 있다. 작은 예로, 간 총리의 담화에 언급된 문화재(도서) 반환 문제를 보자. 황성신문 1909년 7월 7일자를 보면 ‘태황제폐하께서 이등(伊藤) 공작에게 하사하실 물품으로 고래(古來) 서화와 서적을 다수 구입하셨다더라’는 기사가 나온다. 고종이 침략자 이토 히로부미에게 선물하려고 옛날 그림·글씨와 책, 즉 귀중한 전통 문화재를 잔뜩 사들였다는 말이다. 이런 일들이 있었으니 앞으로 일본 내 우리 문화재를 무조건 전부 반환하라고 요구하기도 껄끄러워지는 것이다.



매를 맞은 사람은 때린 사람에게 항의하고 책임 지우는 한편으로 왜 맞았는지 철저히 분석해야 한다. 안 그러면 또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병자호란 때 살아 돌아온 ‘환향녀(還鄕女)’를 박대해 이중 피해자로 만든 아픈 역사를 반성하지 못하고 다시 ‘종군위안부’ 피해자를 초래한 어두운 기억이 있다. 모레가 8·15 기념일이다. 나는 광복의 기쁨에 앞서 식민지 지배에 이르게 된 ‘불편한 진실’들을 먼저 되새기고 다짐하는 8·15가 되기를 바란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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