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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선통신 혈당계 개발했더니 … 식약청 따로 방통위 따로 허가

중앙일보 2010.08.13 00:23 경제 2면 지면보기
A이동통신사는 지난해 농어촌 지역 농지와 임야에 통신용 전신주를 설치했다. 전신주 1개를 설치하는 데 보통 70만원 정도의 공사비가 들지만 이 회사는 각종 인허가·용역 비용으로 개당 145만~200만원을 썼다. 지난해 이와 관련한 인허가 비용만 11억4000만원이 들었다. 용도 변경을 하는 데는 평균 60일이 걸렸다.


전경련 ‘요지경 규제’ 182개 지목

의료기기를 제조하는 B사는 근거리 무선통신이 지원되는 혈당계를 개발했으나 국내 출시를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의료기기와 통신기기가 결합된 상품은 식품의약품안전청(의료기기법)과 방송통신위원회(전파법) 허가를 모두 받아야 하는데 서로 중복되는 과정이 많고 시간적·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많다. 결국 이 회사는 해당 제품을 유럽에서만 판매하고 있다.



송유관을 운영하는 C정유회사는 2008년 기름 도난범에 의해 송유관이 파손되는 사고를 당했다. 피해를 본 것도 억울한데 이 회사는 기름 유출로 인한 토양오염 조사·복구 비용, 시설 보수 비용 1억3000여 만원을 부담해야 했다. 송유관 손괴로 인해 석유가 유출될 경우 토양오염복원 책임이 송유관 운영자에게 있다는 토양환경보전법 규정에 따른 것이다.



기업 활동의 발목을 잡고 있다며 재계가 ‘당장 뽑아내야 할 규제 전봇대’로 지적한 사례들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는 12일 토지·건설·공정거래 등 9개 분야 182개 규제개혁과제를 국무총리실과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에 건의했다. 이 중에서 ▶과도한 비용이 드는 규제 ▶준수 가능성이 낮은 비현실적 규제 ▶신규 사업과 영업활동을 제한하는 규제 ▶중복·차별 규제 등 기업인을 혼란스럽게 만든 사례 30가지를 함께 공개했다. 지난 2월 350여 회원사를 대상으로 발굴한 규제 사례 300여 건 중에서 추려낸 것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부터 강도 높은 규제개혁 정책을 펼쳤음에도 산업 현장에서는 비용이 과도하게 들거나 준수 가능성이 낮은 ‘전봇대’가 도처에 있다는 얘기다.



관광단지 안에서 휴게시설을 운영하는 D사는 휴게소 15㎡를 증축하는 데 인허가에만 석 달이 걸렸다. 공장 옥상 부지를 활용해 태양광 발전 사업을 하기로 하고 사업신청서를 냈으나 ‘공장이 일부만 가동 중’이라는 이유로 불허되는 이해하기 힘든 일도 벌어졌다. 알코올 성분이 1% 이상 들어갈 경우 주류로 분류돼 소스 개발에 어려움을 빚고 있는 E식품회사, 이미 정밀검사를 통과한 소비자가격 60만원대 와인 3병 가운데 1병을 ‘검사용’으로 제출했다는 F사 얘기도 있다. 이 중에서 ▶조선업계의 재무건전성 기준 완화 ▶택배업계의 화물차 증차 요구 등은 2년 넘게 올라온 ‘해묵은 전봇대들’이다.



전경련이 규제개혁 과제를 정부에 건의한 것은 2008년 이후 올해가 세 번째다. 지금까지 330여 건이 건의돼 절반가량이 반영됐다. 전경련 양금승 규제개혁팀장은 “현 정부 들어 규제가 대폭 완화됐으나 여전히 현장에서는 규제개혁 목소리가 높다”며 “각종 불합리한 규제가 개선된다면 기업의 경영 여건이 좋아지고 우리 경제가 안정적 성장궤도에 오르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친서민·중소기업 정책의 효과를 높이고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도 보다 과감한 규제개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연세대 정갑영(경제학) 교수는 “친서민·중소기업 정책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대기업들의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며 “과감한 규제개혁이 (기업 투자를 활발하게 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익명을 원한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최근 강도 높은 규제완화 정책을 추진했다고 하지만 싱가포르 같은 나라에 비해 한국의 기업 환경이 낫다고 보기 힘들다”며 “요즘 친서민·중소기업을 강조하면서 무조건 대기업을 추궁하기보다는 기업 환경을 획기적으로 바꿔 투자를 유도하는 게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가 투자는 뒷전이면서 규제 탓만 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한성대 김상조(경제학) 교수는 “현 정부 들어 출자총액제도 폐지, 금산분리정책 완화 등 과감한 규제완화가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대기업의 투자는 크게 늘지 않았다”며 “최근 대기업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규제로 물타기를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상재 기자

박성진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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