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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같은 불길, 모스크바도 숨 막혀

중앙선데이 2010.08.08 00:21 178호 6면 지면보기
러시아의 한 남성이 5일(현지시간) 화마가 할퀴고 간 모스크바 동남부 리아잔 지역의 골로바노보 마을 인근 숲길을 걸어가고 있다. [AFP=연합뉴스]
“불길이 마치 호랑이처럼 달려들었어요.”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400여㎞ 떨어진 바르코프스키 마을에 살던 타타냐(여)는 산불이 집을 덮쳐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타타냐는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불길이 퍼지는 속도가 워낙 빨라) 아무것도 챙기지 못하고 그저 몸만 빠져나왔다”며 치를 떨었다. 타타냐의 집은 화마가 덮친 뒤 불과 수분 만에 잿더미로 변했다. 그는 “이제 내겐 집도, 옷도,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다”며 허탈해했다.

이번엔 산불, 11년간 6번 ‘8월의 저주’ 겪는 러시아


지난달 하순 시작된 러시아 산불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다. 급기야 수도 모스크바가 사실상 도시 기능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영국 BBC 방송은 6일(현지시간) “화재 연기가 모스크바 시민들을 완전히 숨 막히게 하고 있다”며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한다”고 보도했다. 산불과 폭염으로 인한 연기와 안개가 지하철과 건물 내부까지 스며들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모스크바 시내 이산화탄소 농도는 평소보다 3배가량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금 같은 공기를 마시는 것은 비흡연자가 갑자기 하루에 여러 갑의 담배를 피우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보건당국은 시민들에게 외출과 신체활동을 자제하라고 경고했다. BBC는 “대기 오염 정도가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모스크바 인근 두 개의 국제공항도 시계가 300m밖에 확보되지 않아 비행기 이착륙에 차질을 빚고 있다. 미국과 독일·프랑스는 자국민에게 러시아 여행 자제를 권고했다.
사망률도 치솟고 있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지난달 모스크바의 사망자 숫자는 작년 동기보다 50%쯤 늘어났다. AFP통신은 “올해 7월 모스크바에서 1만4340명이 숨져 지난해 동기보다 4824명이 더 많았다”고 전했다. 모스크바 등기소 직원 예프게니아 스미르노바는 “7월 들어 사망자가 갑자기 증가했다. 폭염이 영향을 끼친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화재로 인한 사망자는 6일까지 52명이다. 하지만 화마를 피해 수용소로 대피한 사람들은 사망자가 그보다 훨씬 많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 이재민은 실종된 남편의 시신을 찾다 신원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불탄 시체들을 많이 보았다고 FT에 증언했다.
이날 현재 러시아 중부지역을 중심으로 560여 곳에서 여전히 불길을 잡지 못하고 있다. 니즈니 노브고로드, 리아잔 등 7개 지역은 비상사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군 부대와 핵시설 등 주요 시설에 대한 피해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 러시아의 리아 노보스티 통신은 카딤 코발 전략미사일군 대변인과 국영 원자력회사 로사톰 관계자의 말을 인용, “미사일 보관 시설과 원자력발전소는 화재로부터 안전하다”고 보도했다.

문제는 화재의 직·간접 원인인 폭염이 조만간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모스크바의 한낮 기온은 여전히 섭씨 40도에 육박한다.

러시아 정부는 산불과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불길 잡기가 쉽지 않다. 수백 군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불이 난 데다 이들 지역에 대부분 제대로 된 길조차 없어 소방차량이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다. 불이 나도 불을 끌 수 있는 물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해 화재 확산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모스크바 카네기센터 니콜라이 페트로브 연구원이 말했다.

러시아 정부의 허술한 재난 대응 시스템도 도마에 올랐다. 러시아 소방예산이 급감함에 따라 정부 내 소방 전문가 숫자도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그린피스 모스크바 사무소의 알렉세이 야로셴코는 “최소한 소방 인력의 75% 이상이 일상적인 서류 작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상황 악화를 우려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배후에서 ‘상왕’ 역할을 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에게도 공격의 화살이 쏠린다. 러시아 환경단체들과 일부 정치인들은 이번 산불 사태는 4년 전 푸틴 총리가 대통령으로 재임할 당시 대기업 로비를 받아 통과시킨 산림법 때문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2006년 푸틴의 명령에 따라 산림보호를 담당하는 중앙시스템이 해체되고 러시아의 광대한 삼림이 무방비 상태로 방치됐다는 것이다.

한편 러시아의 이웃나라인 우크라이나에서도 폭염·가뭄에 따른 대형 산불이 발생해 동부 도시 드니프로페트로프스크 인근의 군 기지 3㎞ 지점까지 번졌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는 벌써 1000만㎡의 숲이 불에 탔다고 재난 당국이 밝혔다.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비상사태부 장관은 “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로 누출된 방사능 물질이 오염된 토양에 묻혀 있다가 이번 화재로 대기 중으로 뿜어져 나올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프랑스 일간 르 피가로는 7일 핵안전연구소(IRSN) 관계자들을 인용, 대기 중에 유출된 방사능 물질이 프랑스까지 도달할 수 있지만, 이것이 건강상 문제를 일으킬 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전했다.

러시아 현지에선 8월이면 국가적 재난 사태가 잇따라 ‘8월의 저주’라는 말이 돌고 있다고 FT가 보도했다. 21세기 들어 11년간 여섯 차례나 8월에 대형 사고가 발생한 것을 놓고 이르는 말이다.

폭염·화재 때문에 국제 곡물값 급등
2000년에는 쿠르스크 핵잠수함이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해에서 침몰해 승조원 118명 전원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2004년에는 체첸 반군의 모스크바 지하철 폭탄테러가 발생해 10명이 숨졌고, 같은 공항에서 이륙한 여객기 두 대가 공중에서 거의 동시에 폭발하는 바람에 90여 명이 사망했다. 여객기 동시 테러는 ‘러시아의 9·11’로 불리기도 했다.

2005년 8월에는 잠수정 ‘프리스’가 극동 캄차카 반도 인근 해저에 침몰했다. 영국·미국 등의 지원으로 사고 사흘 만에 승조원들이 극적으로 구조됐지만 러시아는 강대국의 체면을 구겨야 했다. 2008년 8월에는 그루지야와 전쟁을 치렀다. 지난해에는 러시아 최대 수력발전소인 사야노-슈센스카야 발전소가 폭발해 70여 명이 숨지는 비극을 겪었다.

러시아의 폭염과 산불은 국제 곡물가격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 3위 곡물 수출국인 러시아는 극심한 가뭄으로 수확량이 줄자 올 연말까지 밀을 비롯한 곡물 수출을 전면 중단한다고 5일 발표했다. 수출 금지 품목은 밀·옥수수·보리·호밀 등이다. 이에 따라 시카고상품거래소(CBT)에서 9월 인도분 밀 가격은 2008년 식량 파동 이후 이날 최고치를 기록했다. 시장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수출 중단 여파를 우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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