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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쪽짜리 야구 매뉴얼 못 외우면 출전 못한다

중앙선데이 2010.07.24 23:42 176호 16면 지면보기
SK 선수들은 동업자 의식과 경쟁심이 어우러진 묘한 팀워크를 보인다. 선수들은 스스로를 개인사업자로 여긴다. [뉴시스]
월드컵 열기가 지구촌을 뒤덮어도, 장맛비가 하루가 멀다 하고 내려도 프로야구는 계속됐다. 어느덧 전반기가 끝나고, 올스타 브레이크를 맞았다. 가쁜 숨을 돌리며 성적표를 살펴본다. 올 시즌에도 SK가 1위다. 25일 현재 2위 삼성과 7.5게임 차이가 난다. SK가 8경기를 지고 삼성이 8경기를 이겨야 순위가 바뀐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SK는 한국시리즈 직행 티켓을 여름이 끝나기도 전에 예약한 거나 다름없단 소리다.
당할 상대가 없는 극강의 팀 SK 와이번스. SK의 일본인 선수 가도쿠라는 “이런 야구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SK의 야구는 그만큼 독특하고, 강한 경쟁력을 자랑한다. 정교하고 과학적이라는 일본 야구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일류 투수마저 감탄하게 만든 SK의 비밀은 무엇일까.

‘야구의 삼성전자’ SK와이번스 영업비밀은


야구를 흔히 인생에 비유하듯 프로야구단은 샐러리맨이 일생을 바치는 기업에 비유할 수 있다. 사주(오너)가 있고 사장(감독)이 있으며 임원(코칭스태프)과 사원(선수)이 있다. 하루하루 승패에 목숨을 걸고, 연간 실적으로 기업의 경쟁력을 평가받는다. SK 와이번스는 초우량 기업이다. 반도체 최강 삼성전자, 휴대전화 최강 노키아에 비견할 만한 극강의 기업이다. 그들의 영업 비밀을 훔쳐낸다면 꼴찌도 일등을 할 수 있을까?

김성근 감독 인적네트워크가 재산
SK에는 ‘ID野球MEMO’라는 28쪽짜리 야구 매뉴얼이 있다. 모든 선수는 이 매뉴얼을 외워야 한다. 볼카운트 1스트라이크 노볼에서 타자가 숙지해야 할 원칙은 8개씩. 여기에 기록원이 신경 써야 할 항목도 4개나 된다. 이 매뉴얼은 일본 프로야구의 명장 노무라 가쓰야 감독의 ‘ID야구’를 기본으로 한다.

김성근 감독
광복 이후 한국 야구의 기술적 발전을 주도한 사람들은 와세다대 야구부 주장을 한 고 김일배씨 등 일본 야구 출신이었다. 국내에 슬라이더라는 구종을 최초로 보급한 이들도 신용균·김영덕 등 재일동포였다. 김성근 감독에게 “당신이 야신(야구의 신) 소리를 듣는 건 일본어에 능통해서가 아닌가”라고 물어봤다. 김 감독은 “그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국회도서관에 ‘야구’라는 키워드로 등록된 단행본은 모두 121종. 일본에선 한 해에 그보다 많은 수의 야구 서적이 쏟아져 나온다. 일본이 야구 선진국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그만큼 정보의 양과 질도 우수하다.

한국 야구의 성장과 더불어 국제 교류도 잦아졌다. 롯데는 3년째 미국인 제리 로이스터 감독을 기용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나 일본 야구의 본류에 접근할 수 있는 인물은 드물다. 특히 현장 야구인 중에는 자유롭게 영어나 일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매우 적다. 김 감독은 전지 훈련 기간 중 수시로 도쿄에서 일본 야구계 인사들과 접촉한다. 인적 네트워크 구축이 가능한 수준이다.

1960년 18세의 나이로 일본에서 혈혈단신 건너온 재일동포 출신의 김성근이 자신과 뜻이 맞는 후배를 양성해 오늘날 ‘김성근 야구사단’으로 불릴 정도의 그루핑에 성공한 비결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이 네트워크는 김성근에게 야구계 안팎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빠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수시로 정보를 제공한다. 야구계에서 벌어지는 일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김성근의 귀에 ‘제보’돼 있는 경우가 많다.

누구도 반발 못하는 카리스마
김성근 감독은 백업 포수를 4번 타자로 기용하기도 한다. 그는 특정 투수와 특정 타자의 대결을 구체적으로 데이터화해 상황에 맞게 기용한다. 이런 기용법이 성공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첫째, 감독은 선수의 능력과 플레이 상황에 대해 성공 확률 높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연구하고 이해해야 한다. 둘째, 해당 선수들이 반발하지 않을 정도의 카리스마를 갖고 있어야 한다.

SK 구단은 선수들에게 행복한 직장은 아니다. ‘세계에서 훈련을 가장 많이 하는 팀’이라는 평은 일본 쪽에서도 나온다. 엄청난 훈련량은 감독이 자신의 리더십을 선수단에 납득시키는 과정이다. 지겨울 정도의 반복 훈련은 직감보다는 경험과 확률을 존중하는 경영 철학의 산물이기도 하다.

2009년 7월. 김성근 SK 감독은 이때를 “부임 후 가장 경기가 안 풀렸던 시기”로 꼽는다. 그해 7월 4일부터 21일까지 SK는 11경기에서 1승10패를 기록했다. 굳건해 보였던 1위 자리도 위태로웠다. 김 감독은 7월 22일 한화와의 경기를 앞두고 유니폼을 갖춰 입고 공을 집어 들었다. “정근우, 다시.” 전날까지 3할2푼4리의 고타율을 기록 중이던 정근우 앞에서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네 배트를 봐. 앞쪽으로 너무 기울어졌잖아. 빠른 공이 오면 어떻게 칠래.” 노감독의 불호령에 정근우는 배트를 뒤쪽으로 뉘였다. 몇 차례나 자세 교정이 이어졌다.

SK는 선수들의 ‘자율훈련’만도 8개 구단 중 가장 강도가 높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김 감독이 움직이면서 양과 강도는 배가 됐다. 경기가 없던 7월 20일, SK 선수들은 낮 12시부터 오후 6시40분까지 훈련했다. 3연전 중 하루는 야간 특타를 실시했다. 경기가 끝난 뒤 경기고 혹은 인하대 운동장을 빌려 ‘자정을 넘긴 훈련’을 실시했다. SK는 22일과 23일 한화전에서 연승을 거뒀다.

두 번 실수는 없다
독주체제를 갖춘 2010년에도 김 감독의 태도는 크게 다르지 않다. 7월 13일 한화와의 인천 경기에서 최윤석이 번트에 실패했다. SK는 이날 7-3으로 이겼다. 이튿날 평소보다 일찍 경기장에 나온 김 감독은 최윤석의 훈련 장면을 유심히 살폈다. 김경기 SK 타격코치와 함께 번트 훈련을 하는 장면을 확인하고 나서야 다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날 김 감독은 “어제 그런 실수(번트 실패)를 했으면 당연히 번트 훈련부터 해야지. 코치들이 안 그랬다면 내가 붙잡고 시켰을 거야”라고 말했다.

SK는 지난 6월 18일 이만수 수석코치를 2군 감독으로 보냈다. ‘좌천’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이 코치는 차기 감독감으로 지목된 인물이기에 충격은 적지 않았다. 김 감독과 이 코치가 2006년 10월 동시에 영입됐을 때부터 ‘불편한 동거’라는 시각도 있었다. 야구관이 워낙 달랐기 때문이다. 냉혹하게 보일 수도 있는 처사다. 그러나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출신을 가리지 않고 쓴다.

SK는 8개 구단에서 가장 많은 일본인 코치 네 명을 쓰고 있다. 국내 지도자들은 이에 대해 비판했다. 그러나 SK는 “국내 코치들이 이들을 뛰어넘으면 된다”는 입장이다. 실력 위주 인사다. 프로야구단에서 코치 인선에는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에 대한 예우, 모그룹 고위층과의 인맥 등 능력 외 요소들이 개입된다. 김 감독이 2002년 LG에서 해임된 이유도 코치 인선 권한에 대한 프런트와 감독의 입장이 달랐기 때문이다.

프로 선수는 개인 사업자
SK 야구의 특징은 토털 베이스볼이다. 토털 베이스볼은 곧 무한 경쟁을 의미한다. 고인 물이 썩듯, 경쟁이 없는 팀은 정체하고 퇴보하게 마련이다.

SK의 무한 경쟁은 결국 선수들에게 ‘나는 내가 벌어 내가 먹는 개인 사업자’라는 의식을 강요한다. 언제든 내 자리를 빼앗을 수 있는 경쟁자가 대기하고 있다. 2007년 김성근 감독이 부임할 때 SK의 주축 선수는 김재현·박재홍 등 베테랑이었다. ‘2군’ 출신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김 감독을 향해 베테랑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들이 성적을 내기 시작하자 생각이 바뀌었다.

‘SK가 가진 최고 자산’은 포수 박경완(38)이다. 조범현 KIA 감독은 “박경완은 포수에게 전달되는 방대한 자료를 모두 이해하고 경기에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포수”라고 칭찬했다. 이런 박경완의 자리도 ‘정년 트랙’은 아니다. 박경완이 왼쪽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쉴 때 SK는 정상호로 공백을 메우면서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했다. 정상호는 다른 팀이었다면 이미 주전이 됐을 것이라고 평가받는 포수다.

‘주전 못지않은 백업’은 SK의 어느 포지션에나 있다. 외야수 조동화는 3안타를 치고도 마지막 회 수비에서 쉬운 공을 놓치자 다음 날 경기 선발라인업에서 제외됐다. SK에서 ‘실수는 실책과 동일어’가 아니다. 2008년 SK는 실책 102개를 했다. 8개 구단 중 가장 많았다. 2009년에는 94개의 실책을 기록했다. 롯데(96실책)만 SK보다 많았다. 그러나 프로야구 팀들이 손꼽는 ‘가장 수비가 강한 팀’은 SK다.

김 감독은 “잡기 어려운 공을 따라가다 글러브를 거두는 수비수들이 많다. 그러면 (기록상의) 실책은 면한다. 그러나 SK 선수들은 끝까지 다이빙 캐치를 한다. 과감한 수비를 하다가 실책을 할 수 있다. 하지만 팀 사기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 어떤 투수가 글러브를 빼는 야수를 믿고 공을 던지겠는가”라고 말했다. SK는 통계 뒤에 숨은 수비력이 더 강한 팀이다.

경쟁팀의 선수들은 SK 2루수 정근우, 유격수 나주환을 ‘다이버’라고 부른다. 그들은 빠져나가려는 공을 향해 맹렬히 몸을 던진다. 물론 실책도 나온다. 하지만 SK 투수들은 그들을 향해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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