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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 전 세종, 집현전 관리들에게 ‘북캉스’를 명하다

중앙선데이 2010.07.24 23:34 176호 20면 지면보기
무더운 여름은 진작부터 독서의 계절이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란 말은 가을에 가장 독서하지 않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라는 건 이미 널리 알려졌다. 직장인의 휴가와 학생의 방학이 맞물린 7·8월은 출판계의 대목이다. 매출이 가을의 두 배를 넘는다고 한다.

책과 떠나는 북캉스

지난 2일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 주말판에 실린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굵게 쓰인 ‘나의 완벽한 여름(My Perfect Summer)’. 신문은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경제학자인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 등에게 여름휴가에 대해 묻고 있었다. ‘올해 휴가는 어디로 떠나나(Where are you going on holiday this year?)’라고. 멋진 장소가 완벽한 휴가의 으뜸 조건임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 뒤를 이은 질문은 바로 ‘휴가 중엔 무얼 읽을 것인가(What will you be reading on holiday?)’.
휴가의 최고 동반자는 누가 뭐래도 책이다. 휴가철이 곧 독서철인 셈인데, 요즘엔 아예 ‘북캉스(bookance)’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더위를 피해 산이나 바다만 찾을 게 아니라 책으로 더위를 다스려 보자는 거다. 책(book)과 바캉스(vacance)를 조합한, 한국 사람만 알아듣을 법한 신조어이지만 ‘바캉스 대신 북캉스를 떠나자’는 말은 입에 착 달라붙는다.

조선시대에도 ‘북캉스’가 있었다. 왕은 신하들에게 책을 읽으라고 ‘독서 휴가’를 내렸다. 세종 때의 ‘사가독서(賜暇讀書)’제도다. 즉위 8년인 1426년 12월 11일에 기록한 『세종실록』엔 집현전 학자인 권채·신석견·남수문에게 “출근하지 말고 글을 읽으라”고 한 어명(御命)이 남아 있다.

“세종이 집현전 부교리(副校理) 권채와 저작랑(著作郞) 신석견, 정자(正字) 남수문 등을 불러 명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관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本殿)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세조의 집현전 혁파로 사라졌던 사가독서를 부활시킨 성종의 어명도 이 못지않다. ‘사가독서 문신에 대한 권장 사목(事目)’이다. “읽은 책의 권수를 계절마다 아뢰도록 하라”고 했을 뿐 아니라 “정월과 동지, 큰 경사와 큰 하례 외엔 참여하지 말라”며 독서에 전념할 것을 당부했다.

절정의 더위와 더불어 본격적인 휴가철이다. 고생길이 뻔한 복잡한 휴가를 떠나느니 그동안 쌓아 놓고도 보지 못한 책을 몰아 보겠다는 ‘북캉스족(族)’이 늘고 있다. 언론마다 휴가철 책 특집이 등장하고 주요 온·오프라인 서점도 ‘여름 추천 도서전’에 한창이다. 삼성경제연구소 같은 단체에선 ‘CEO가 휴가 때 읽을 책’ 목록을 발표하기도 했다. 여기엔 중앙SUNDAY에 이덕일의 事思史를 연재하는 역사학자 이덕일씨의 책 『조선왕을 말하다』도 포함됐다.

최근 프랑스의 유력 일간지 르몽드는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 『심청』을 ‘바캉스에 함께해야 할 책’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올 상반기 프랑스에서 출간된 책 중 문학 10권, 비문학 10권을 꼽은 목록에서 『심청』은 문학 부문 첫째로 꼽혔다. 르몽드는 “19세기 중반, 황해에서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몸을 팔아 버린 심청의 운명은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쓸려 간다. 그것은 사람들의 욕망과 아시아 문학의 역사가 안내하는 길이다. 돈으로 사고파는 이 쾌락의 오디세이에서 율리시스는 이주민이자 여자다”는 짤막한 서평도 덧붙였다.

중앙SUNDAY도 무얼 읽으면 좋을지, 도심에서 느긋하게 책장 넘길 곳은 어딘지 물색했다. 사실 어디서 무얼 읽느냐는 각자 나름의 취향이다. 르몽드의 추천대로 황석영 작가의 장편소설 『심청』을 읽어도, 취향 따라 추리소설로 서늘한 여름을 만끽해도 좋다. 돗자리 펴고 누워 뒹굴며 만화책을 뒤적이면 또 어떤가. 휴가와 독서라는 최상의 조합으로 지친 몸엔 휴식을, 바쁜 마음엔 여유를 주고 지식의 충전을 더할 수만 있다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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