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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도·퍽치기 가출소년 저를 세상은 ‘6호’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행복해요, 왜냐고요?

중앙일보 2010.07.24 01:19 종합 20면 지면보기
‘6호.’


[내러티브 저널리즘 리포트] 아동보호치료시설서 가족사랑 되찾은 17세 정우

두 달 전 5월, 가출 청소년인 나 (정우·17·가명)는 세상으로부터 이 번호를 받았다.



“보호소년에게 장기보호관찰을 받을 것을 명한다.”



서울가정법원 소년부의 판결에 따라, 나는 이 번호를 받은 친구들과 함께 아동보호치료시설인 서울 영등포구의 살레시오 근로청소년회관에 살고 있다. 이번이 두 번째다. 죄명은 ‘야간 건조물 침입 절도’. 서울의 한 대학 도서관에서 지갑을 두 번 훔쳤고, 세 번째 범행을 하다 잡혔다. 내가 훔친 두 개의 지갑에는 현금 6만5000원, 3500원짜리 식권 8개가 들어 있었다.



이전에는 퍽치기를 하다 ‘6호’를 받았다. 주거 침입 절도도 있다. 나의 범죄 경력을 조회하면 죄명과 처분일이 기록된 글씨들로 빼곡하다. 나의 사연은 이 글씨들보다 더 빼곡하고 길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는 이는 없었다. 대부분 ‘요즘 10대들은’ ‘부모의 잘못’ ‘세상이 말세’라는 말로 간단히 끝낸다.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갈 데까지 가보자’고 생각했다. “돈을 훔친 건 먹고살기 위한 방편이자, 일종의 놀이였고 세상을 향한 외로운 외침이었다.” 나는 이렇게 항변한다.



#엄마 찾기 위해 23차례 가출하다



“정우는 성난 이리 같네.”



2008년, 처음 살레시오에 와서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내게 수사님이 그랬다. ‘저 이리 아닌데요. 이리는 가족이라도 있지….’ 이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늘 그랬듯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곳에 오기까지 많은 사람이 물었다. “왜 그랬느냐고, 계속 그렇게 살 거냐고.” 나는 되받아치고 싶었다. “날 왜 방치했고, 언제까지 이렇게 둘 거냐고.”



모든 시작은 10년 전(초등학교 1학년), 처음 집을 나왔을 때였다. 부모님이 이혼한 뒤 2년 동안 엄마가 미치도록 그리웠다. 아버지가 술에 취해 나를 때리고, 새엄마와 형이 날 몰아붙여도 ‘엄마만 찾으면 된다’고 수없이 일기장에 썼다.



‘엄마한테 가서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얼마나 외로웠는지 다 말할 거야.’



어느 날 집을 나왔다. 엄마가 살고 있다는 충남의 한 중소 도시를 이틀 동안 걸었다. 밤에는 놀이터에서 잠을 잤다. 엄마를 만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새엄마는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며 대걸레 자루로 날 때렸다. 나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집을 23차례 나왔다.



엄마랑 딱 한 번 같이 산 적이 있다. 아버지가 행방불명된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는 재혼해 다른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남편·시어머니, 아들 셋. 엄마는 내가 늘 꿈꿔왔던 엄마가 아니었다. 조금만 잘못을 해도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날 혼냈다. 시어머니와 남편 눈치 보는 드라마 속의 옛날 엄마 같았다. 엄마를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을 삼켜야 했다. 나는 점점 로봇처럼 뻣뻣해졌다. 3개월 뒤 엄마는 나와 동생(15)을 경기도의 한 청소년 보호쉼터로 보냈다. 고아원과 별 차이 없는 곳이다.



# 6호 처분을 받다



2007년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쉼터를 무작정 나왔다. 이번에는 엄마를 찾아가는 대신 인터넷으로 비슷한 처지의 형들을 만났다. 형들은 내게 중요한 일을 맡겼다.



“야, 너 대문 앞에 서 있다가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휴대전화 들고 큰소리로 통화하는 척해.”



“형, 티 나지 않을까.”



“괜찮아, 이건 우리끼리의 게임이야. 아무도 관심 없어.”



형들은 30번 넘게 담을 넘었고, 나는 그 앞을 지켰다. 밥 먹고 PC방에서 게임을 하려면 우리에겐 돈이 필요했다.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서는 사는 곳을 대거나, 부모 동의서를 가져가야 했다. 그러나 동의서나 주소가 없었다. 남의 돈을 슬쩍 하는 것이 제일 쉬웠다.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곧 놀이처럼 느껴졌다.



‘형들이 무사히 집에서 나오면 돈이 생긴다. 나는 그 앞을 잘 지키면 된다.’



어느 날, 순찰 중인 경찰에게 우린 잡혔다. 형들은 소년원에 갔고, 나는 풀려났다.



다음 해 크리스마스 이브. 나는 친구들과 청량리역 앞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쉼터를 나오기만 하면 비슷한 처지의 친구를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뭉치면 우린 강했다. 우리는 좀 더 적극적인 게임을 하기로 했다. 있어 보이는 사람을 뒤에서 밀치고, 가방을 뺏어 달아났다. 일명 ‘퍽치기’. 나는 또다시 붙잡혔고, 처음 선 법정에서 ‘6호’ 처분을 받았다.



#너의 잘못이 아니다



“정우야, 네 잘못이 아니야.”



“젊다는 이유만으로 우린 널 사랑해.”



살레시오 근로청소년회관은 6호 아이들의 치료를 위해 아이들이 공예품을 만들게 한다. 이를 모아 1년에 한 번 ‘세상을 향한 발돋움’을 주제로 전시회를 연다. 이달 초 열린 전시회를 위해 정우(왼쪽)가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함께 전시회 준비를 하고 있다. [김경빈 기자]
살레시오의 수사님과 사회복지사 선생님은 끈질겼다. 목공예·음악·모래치료 때도, 밥 먹고 축구를 할 때도 내게 말을 걸었다. 살레시오 근로청소년회관은 살레시오수도회가 운영하는 청소년 쉼터다. 일반 쉼터와 다른 점은 6호 처분을 받은 친구가 대부분이라는 것. 이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부모와 함께 살지 않고, 가출해 비슷한 일을 저지르다 이곳에 왔다. 나는 그들과 함께 오전에는 심리치료를 받고, 오후에는 고등학교 입학 검정고시를 위해 공부했다. 주말에는 선생님과 함께 영화를 보러 나가기도 했다. 선생님과 친구들은 다짜고짜 나만 탓하거나 야단치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듣고 수긍했다. “괜찮다”고 말했다. 나는 눈물이 나왔다. 두서없이 이야기를 늘어놓고, 오리새끼처럼 사회복지사 선생님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6개월 뒤, 살레시오의 정문을 나서던 날.



“정우야, 나가면 이리가 아니라 양이 되어 사는 거야.”



“외로울 때마다 형들 말고 선생님한테 문자 보내.”



선생님들의 말을 뒤로 하고, 나는 엄마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충남의 친엄마 집에 살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감자를 튀기고, 햄버거 패티를 구웠다. 열심히 배워서 요리사가 되고 싶었다. 첫 월급으로 받은 60여만원을 엄마에게 몽땅 드렸다.



그러던 중 농사를 짓는 엄마와 새아버지가 트럭을 타고 가다 교통사고가 나 새아버지가 많이 다쳤다. 엄마는 아버지의 병간호로 병원에 계속 있어야 했다. 모두가 지쳐갔다. 할머니, 세 동생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살레시오처럼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어느 날, 부쩍 큰 동생들이 내게 엉겨붙었다.



“형, 심심한데 우리하고 놀자.”



“야, 저리 가.”



“아, 우리 집에 있으면서 되게 뻐기네.”



“뭐?”



“맞잖아. 여기 형 집 아니고 우리 집이잖아.”



치고받는 싸움이 났다. 할머니는 내가 칼을 들고 동생을 협박했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억울하다고, 엄마 집에서 못 살겠다고 하소연하는 내게 엄마는 8만원을 내밀었다.



“엄마도 힘들다. 일단 서울에 가 있어라.”



나는 말을 다시 삼켰고, 집을 나왔다.



청량리 역전에서 보낸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처럼 올해 2월도 몹시 추웠다. 나는 서울의 한 대학교 도서관 열람실에서 3만5000원이 든 지갑을 훔쳤다. 그리고 일주일 뒤, 지갑 하나를 또 훔쳤다. 돈이 필요했지만 더는 게임이 아니었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세 번째, 폐쇄회로TV(CCTV) 영상을 보고 순찰하던 경찰관에게 붙잡혔다. ‘야간 건조물 침입 절도’라는 죄명이 내게 딱지처럼 붙었다.



엄마가 구치소로 나를 찾아왔다. 경찰의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구치소 철창 너머 나를 보고 엄마가 울었다. “내가 널 이렇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하다”고 했다. “다시 한번 잘해보자”며 날 달랬다. 엄마는 나를 소년원에 보내지 말도록 재판부에 호소했다. 엄마의 정성이 통한 걸까. 나는 다시 살레시오로 보내졌다.



#백설기처럼 다시 시작하는 삶



지난달 9일은 내 생일이었다. 그날 살레시오 건물 앞에 두 대의 택시가 섰다. 엄마·이모·외숙모 등 가족들이 우르르 내렸다. 손마다 잡채·떡·과일 등이 들어 있는 보따리를 든 채였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본 새하얀 백설기 케이크 앞에서 내 얼굴이 빨개졌다.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잘해서 들어온 것도 아닌데….”



일부러 심드렁하게 말했다. 하지만 가슴이 벅찼다. 원망·분노가 조금씩 사그라진 마음 한구석에 희망과 기쁨이 밀려 들어왔다.



“정우야. 이 새하얀 떡처럼 다시 태어났다고, 이제 한 살이라 생각하고 새로 시작하는 거야.”



엄마가 잘라준 떡을 입안 가득 밀어 넣었다. 나는 모두 앞에서 오랜만에 활짝 웃었다.



에필로그



정우는 매주 엄마와 통화한다. 내 편이 생긴 아이에겐 꿈도 생겼다. 정우는 인테리어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남들이랑 똑같이 가족이 함께 사는 평범한 삶을 꿈꾼다. 지난날을 후회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법도 배웠다. 길 위에서 방황하는 친구에게 “스스로 포기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끝까지 막 나가지 말고 집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며칠 전 상담치료 시간에 가족의 의미를 적는 종이 앞에서 정우는 망설였다. “가족은….” 아이의 머릿속에 많은 사건과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디 있는지도 아직 모르는 아버지, 다른 쉼터에서 지내는 동생, 그리고 엄마. 소중한 엄마…. 정우는 잡은 펜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썼다.



“가족은 하나여야 한다.”



글=한은화 기자

사진=김경빈 기자



6호 = 범죄를 저지른 만 19세 이하 소년범에게 법원이 내리는 1~10호의 보호처분 중 6개월간 아동보호치료시설에서 치료교육을 받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1~5호를 받는 아이는 보호처분·관찰 등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7호 이상은 소년원 생활이다. 김귀옥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는 “기관에서라도 부모의 따뜻한 정을 느껴 선도될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에게 6호를 내린다”고 했다. 그러나 법원 수탁기관으로 지정된 6호 시설은 전국에 6곳뿐이다. 김 부장판사는 “최근에는 부모가 아이를 관리해 주지 못하는 가정이 많아 아이를 6호 시설로 보내려고 해도 시설이 부족해 판결을 내릴 때 고민이 많다”고 설명했다.



내러티브 저널리즘 (narrative journalism) 기존의 ‘단순 사실 전달식’ 기사 형태에서 벗어나 소설 문장처럼 ‘이야기하듯’ 구성하는 기사 형식. 주요 인물을 추적해 사건의 이면을 보여주고, 사실을 현장감 있게 전달하는 글쓰기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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