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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세상사 편력] 증오의 석탄을 집으면 화상을 입을 뿐이다

중앙일보 2010.07.24 00:19 주말섹션 15면 지면보기
늑대가 어린 양을 만나자마자 화를 냅니다. “너, 지난해 내 욕하고 다녔지?” 양이 대답했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그때 전 태어나지도 않았는걸요.” 그러자 늑대가 말했습니다. “그러면 네 형이었나 보지.” “전 형이 없는데요.” “그러면 네 가족 중 누구였을 거야. 게다가 너희 편들, 양치기와 개들은 늘 나를 노리고 있었지. 너한테 복수를 해야겠다.” 늑대는 어린 양을 한입에 삼켜 버렸습니다.



잘 아시는 라퐁텐의 우화입니다. 증오가 얼마나 창의적으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만들어 내는지 보여주는 예로서 이만한 게 없을 듯합니다. 한번 생긴 증오는 자연 치유되는 법이 없습니다. 무한한 창의성을 발휘해 끊임없이 증폭되게 마련이지요. 전염성도 강합니다. 어떤 행동을 한 사람만 미워하는 게 아니라 그 가족, 친구, 그와 닮은 사람으로까지 퍼져 나갑니다. 필연적으로 내 편 네 편이 갈리게 되지요. 지금 우리 사회가 그렇습니다.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한 코미디언의 ‘블랙 리스트’ 발언으로 온 나라가 둘로 나뉘어 서로 물어뜯습니다. 좌우가 바뀐 지자체도 그렇고, 지체 높으신 교육감님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코미디언 얘기만 하겠습니다. 어느 쪽이 옳으냐는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거든요. 제가 보기엔 코미디언이나 방송사나 똑같이 어리석습니다. 그 코미디언은 자신이 얼마나 치우치고 기운 발언들을 했었는지 아직도 모르나 봅니다. 그저 작가가 써준 대로 읽었을 뿐이라지만 그렇다고 패 가름에 일조한 책임이 없다고 어찌 믿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방송사도 그렇습니다. 고위 간부가 특정 인물에 고개를 저었다면 조직생리상 그게 블랙리스트가 아니고 뭡니까. 그런데도 실체가 없다고 덜컥 고소부터 하는 게 궁극적 책임을 함께 져야 할 방송사로서 옳은 자세일까요.



제 잘못 제쳐두고 남 잘못 다투는 건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서로 증오 위에 앉아 있는 까닭입니다. 증오는 혼자 다니지 않습니다. 늘 독선과 편견·오만·아집과 동행하지요. 증오로 가득 찬 사람이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광우병보다 더 무서운 거짓 선동이 온 나라를 휘저을 수 있었던 것도 사람들이 공포에서 출발한 증오의 포로가 됐었던 탓이 아니었던가요.



코미디언과 방송사(나아가 권력) 중 누가 더 옳은지 (절대적으로 옳은 쪽은 없을 테니까) 판단은 여러분 몫입니다.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누가 더 그르다고 생각하든 증오부터 하지는 말라는 겁니다. 예수는 “사람을 얼마나 용서해야 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이 491번째 잘못부터는 미워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지요. 죽을 때까지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라는 얘깁니다. 공자도 “평생을 두고 행할 덕목을 한마디로 요약해 달라”는 자공의 질문에 “그것은 곧 용서(其恕乎)”라고 말해 주지요.



물론 용서란 게 쉽지가 않습니다. 예수나 공자 같은 성인들이나 평생 용서하며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용서하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저도 잘 못하는걸요. 하지만 용서는 못해도 이해는 할 수 있을 겁니다. 나하고 생각이 다르다고 미워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그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겁니다.



맛깔스러우면서도 깊이 있는 글을 써서 제가 좋아하는 폴 존슨이라는 영국의 언론인이자 역사가가 있습니다. 그가 최근 처칠 평전을 내면서 지적한 처칠의 덕목 다섯 가지 중 두 가지가 바로 오늘의 주제와 관련된 겁니다. 하나는 처칠이 원한을 품거나 복수하는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싸우다 지고 나면 깨끗이 승복하고 다음 싸움을 준비했습니다. 보다 창조적인 일에 몰두할 수 있었던 거지요. 또 하나는 그런 증오를 갖지 않았기에 처칠이 기쁨을 누릴 여유가 많았다는 겁니다. 그는 유권자들한테 버림받았을 때조차 누굴 탓함 없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면서 삶을 즐길 줄 알았지요. 그랬기에 다시 기회가 찾아왔을 때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향한 큰 걸음을 내디딜 수 있었던 겁니다. 설령 기회가 다시 오지 않더라도 원망과 저주로 나머지 삶을 채우진 않았겠지요.



사랑만 하고 살기에도 모자라는 게 인생입니다. 증오할 시간이 없지요. 게다가 증오는 나머지 시간마저 갉아먹는 해충인걸요. 석가가 훨씬 멋있게 표현했습니다. 기억해 두십시오. “증오란 누군가에게 던질 요량으로 달궈진 석탄덩이를 집어 드는 것과 같아 막상 화상을 입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이훈범 중앙일보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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