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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칼럼] ECB가 동정을 잃었다고?

중앙일보 2010.07.24 00:16 주말섹션 15면 지면보기
유럽중앙은행(ECB)이 얼마 전 심각한 재정위기에 빠진 지중해 국가들의 정부채를 사들임으로써 이들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곧 이런 비판이 터져 나왔다. “ECB는 동정을 잃었다.” ECB의 조치가 국가나 기관에 돈을 지원하는 걸 금지하는 관계법 21조에 명백하게 반한다는 지적이었다.



돌이켜 보면 2008년 미국에서도 연방준비은행(FRB)을 둘러싸고 같은 논란이 일었다. FRB가 무너지는 주택시장을 구하기 위해 정부기관의 부채와 집을 담보로 만든 금융상품을 대거 사들였기 때문이다. FRB의 전 의장인 폴 볼커는 이를 법의 한계선상에서 이뤄진 행위라고 꼬집었다.



두 사례에서 보듯 중앙은행들이 전통적인 통화정책과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30년간 확립된 통념은 중앙은행의 1차 책무가 물가 안정이라는 것이었다. 나아가 1990년대 이후론 물가안정을 보다 정교하게 규정해 ‘인플레이션 타깃’이라는 정책목표를 쓰는 게 유행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물건 값을 일정하게 유지한다는 건 중앙은행의 임무와 상당히 거리가 있다. 중앙은행의 원초적 책무를 살펴보면 물가 안정은 명백한 목표가 아니었다. 돈의 가치가 그에 포함된 귀금속 함유량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중앙은행은 두 가지 사명을 띠고 만들어졌다. 첫째, 중앙은행은 국가의 돈줄을 관리하기 위해 나왔다. 특히 엄청난 비용이 드는 대규모 전쟁이 발발했을 때 말이다. 최고령 중앙은행인 스웨덴 릭스방크(1668년 설립)와 잉글랜드은행(1694년) 모두 그랬다. 같은 이유로 19세기 초 중앙은행들이 잇따라 생겼는데 방크 드 프랑스(1800년)에 이어 노르웨이·핀란드가 바통을 물려받았다.



이때의 중앙은행들은 소수 정치 엘리트들의 이익과 영향력을 위해 존재했다. 현존하는, 그러나 존립이 위태로운 기존 정치질서에 ‘금융 권력’을 부여하는 도구가 중앙은행이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보다 민주적인 정권들은 중앙은행이라는 제도적 혁신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둘째, 중앙은행은 ‘금융시스템 보호’를 위해 탄생했다. 19세기 중반에 나온 중앙은행들은 기본적으로 지급결제 시스템을 관리하고, 유리알같이 깨지기 쉬운 은행 체계를 안정시키려는 임무를 띠었다. 독일의 라이히스방크(1875년)가 설립된 것도 이런 목적 때문이었다. 이 은행은 1873년의 증권시장 붕괴에 대응하기 위해 나왔다. 미국의 연방준비제도(1914년) 역시 1907년의 금융위기 후속타로 생겼다. 이렇게 설립된 중앙은행들 역시 금융 엘리트를 위한 도구라는 의혹을 피할 수는 없었다.



이런 점에서 ECB는 화폐 발행과 물가 안정을 목적으로 생긴 최초이자 순수한 현대적 중앙은행이라고 할 수 있다. ECB는 독일 분데스방크의 정치적 유산을 상당 부분 물려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생긴 분데스방크는 정치력에 끌려다니다 인플레이션과 화폐제도 붕괴를 불렀던 옛 독일 중앙은행의 구태를 벗어나려 했다.



ECB는 흔들리기 쉬운 은행 시스템을 지원하기 위한 기구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옛날 중앙은행들과 달랐다.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 ECB가 은행들을 감독하고 규제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이 붙었다. 결론은 ‘그렇지 않다(No)’였다. 2007년에 닥친 금융위기를 생각하면 당시 내린 결론은 큰 실수처럼 보인다. 바꿔 말하면 위기 앞에서 ECB는 옛날 중앙은행들처럼 행동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물론 그에 따르는 위험도 있다. 화폐정책이 통념을 벗어나면 재정정책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중앙은행이 특정한 계층에 자원을 재배분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주택시장과 유럽의 정부 보조금 혜택자들이 그렇다.



중앙은행들은 새로운 입지를 구축하면서 점점 더 많은 정치적 역할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그에 따르는 책임도 필연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중앙은행 정책을 짜는 데 정치권이 끼어들 수도 있다.



영원한 동정은 영원한 불임을 낳을 뿐이다. ⓒProject Syndicate



해럴드 제임스 미국 프린스턴대 경제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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