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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View] 성석제의 ‘인생 도취’

중앙일보 2010.07.24 00:11 주말섹션 14면 지면보기
2010 남아공 월드컵 16강전, 독일과 잉글랜드의 경기가 벌어지기 시작한 6월 27일 오후 네 시쯤, 나는 베를린 남쪽 조용한 주택가의 한 주점에 앉아 있었다. 희고 작은 간판에 ‘아일랜드 선술집(Irish Pub)’이라고 쓰인 주점 바깥 노천에는 세 대의 TV가 설치돼 있었다.


우루과이한테 다시 한 골 … “그게 인생이오”

주점 이름은 ‘Celtic Cottage’로 굳이 번역하자면 켈트 오두막, 산장, 별장쯤 된다. 오두막에서 별장까지는 편차가 크지만 주점 이름이 궁전이든 기차역이든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은 주점이 이미 환상과 도취를 전제로 하고 있고 그 세계에서는 빈부, 노소, 민족, 피안과 차안의 경계가 흐릿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술을 파는 장소에서는 그곳에서 주로 취급하는 맥주를 광고하는 간판을 주점 앞에 다는 게 일반적이다.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독일은 맥주를 생산하는 양조장이나 맥주 종류가 엄청나게 다양하다는 게 다르다. 켈트 오두막에는 ‘Murphy’s’라는 간판이 달려 있다. 이게 켈트 오두막에서 주로 판매하는 생맥주(영어로는 ‘draught beer’), 곧 ‘통에서 직접 따라주는 맥주(Bier vom Fass)’다.



머피스는 독일산 맥주가 아닌 아일랜드 흑맥주다. 아일랜드 흑맥주의 대명사는 기네스이고, 그중에서도 스타우트가 간판스타다. 스타우트는 ‘강하다’는 뜻을 가진 말로 까맣게 태운 맥아를 사용해 맥주를 제조하기 때문에 씁쓰름한 맛이 진하고 커피향의 부드러운 거품이 일품이다. 기네스는 전 세계 맥주 소비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라거 맥주 사이에서 스타우트 맥주로는 거의 유일하게 20위권 이내의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 기네스보다 100여 년 늦은 1856년, 아일랜드 남쪽 지역에서 제임스 머피가 생산하기 시작한 머피스는 기네스에 비해 지역성, 개성이 강렬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네스를 사람이 북적대는 냉면 명가의 냉면이라고 하면 머피스는 아직 많은 사람이 알지는 못하지만 나름의 맛이 제대로 나는 막국수에 비유할 수 있다. 물론 나는 막국수를 대단히 좋아한다.



전날인 26일에도 나는 켈트 오두막에 왔었다. 역시 오후 4시쯤, 한국과 우루과이의 16강전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는데 인근 주점 가운데서 가장 활발하게 월드컵 마케팅을 펼치는 켈트 오두막 곁을 지나다 여지없이 그물망에 걸려들었던 것이다. TV보다는 머피스 쪽이 더 끌렸다. 다른 주점에도 TV는 있지만 머피스는 독일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망설임 없이 머피스 스타우트를 주문했다. 둘러보니 노천의 탁자에는 나보다 몇 살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네 사람의 중년 남녀가 앉아 있었다. 북위 50도쯤이라 오후 9시는 돼야 해가 지는 나라에서 벌건 대낮부터 TV 앞에 앉아 있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히 축구를 좋아하거나 맥주 혹은 서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지 싶었다. 그들 중 황금빛 머리카락에 뻗친 수염을 한 남자가 내 국적을 확인하고는 한국의 승리를 기원하는 건배를 제의했다. 그때부터 골을 먹으면 위로한다고 건배, 동점골을 넣으면 축하한다고 건배, 다시 한 골을 먹고 나자 잘될 거라고 번갈아 건배를 외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한국이 패하고 난 뒤 조용하게 있던 갈색 머리의 남자가 내게 말했다. “그게 인생이오(It is life)”라고. 나는 독일이 16강전을 하는 날이 언제냐고 그에게 물었고, 다음날 반드시 그 시각에 다시 거기 오겠노라, 꼭 만나자고 약속했다. 독일이 졌을 때 그 문장을 그대로 되돌려주기 위해서.



독일이 영국을 2-1로 리드한 상태에서 전반전이 끝났다. TV에서는 영국이 전반전 후반에 만회골을 넣고도 심판의 실수로 골을 인정받지 못한 장면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보여주고 있었다. 켈트 오두막이 아일랜드식 주점인 까닭에 독일에서는 보기 힘든 영국 응원단 네댓 명이 초반부터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물론 심판의 오심에 잔뜩 화가 나 있었고, 그들보다 스무 배가 되는 독일 사람들은 자신들이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괜스레 미안해하는 분위기였다.



마침내 어제의 그 갈색머리 인사가 화장실에라도 가는 듯 내 곁을 지나갔다. 나는 “이것도 인생이라고 할 건가요?”라고 회심의 슛을 때렸다. 그러자 그는 “천만에요” 하면서 어깨를 으쓱하더니 “전 네덜란드 사람인데요” 하고는 얼른 사라져 버렸다.



머피스의 맛, 씁쓰름하고 부드럽다. 다시 없는 독특한 맛. 강원도 고성의 어떤 막국수를 생각나게 하는.






소설가 성석제는 …



태어나서 처음 마신 술이 막걸리였다. 1960년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난 그에게 어릴 때 술 심부름 하면서 몰래 마셨던 막걸리는 ‘고향’과도 같다. 막걸리·와인 얘기를 하면서 밤을 새우기도 하는 그의 ‘술 사랑’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일상과 삶을 풍자와 해학으로 섬세하게 표현하는 그는 1986년 문학사상에 ‘유리 닦는 사람’으로 등단했다. 『새가 되었네』 『재미나는 인생』 『쏘가리』 『호랑이를 봤다』 『궁전의 새』 『홀림』 『순정』 등을 발표했다. 최근에는 ‘토끼전’을 재미난 해학과 풍자로 재창작한 첫 그림책 『토끼와 자라』를 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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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름 소속기관 생년
성석제
(成碩濟)
[現] 소설가 19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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