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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pecial] 비즈 리더와의 차 한잔 양귀애 대한전선 명예회장

중앙일보 2010.07.24 00:02 주말섹션 6면 지면보기
양귀애 대한전선 명예회장은 남편을 잃고 사업을 떠맡게 된 기업가다. 대한전선을 이끌던 남편 설원량 회장이 2004년 세상을 떠난 뒤 회사를 물려받았다. 남편 내조에만 전념하다가 경영인으로 변신한 지 6년째. 음악 전공을 살려 ‘감성 경영’을 펼치고 있는 양 명예회장을 19일 서울 회현동 집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매일 이곳으로 출근해 회사 주요 현안과 두 문화재단(인송 문화재단·설원량 문화재단) 일을 챙긴다.


‘측근은 자신보다 나은 사람으로 … ’ 남편 충고가 가슴에 남아 있죠

글=박현영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 설원량 회장께서 타계한 지 6년 됐습니다.



“요즘도 매일 꿈에 나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가족이 함께 있는 장면이에요. 이젠 그만 오라고 해도, 계속 오네요. 회사와 가족들이 걱정인가 봅니다.”



대한전선은 1955년 설립 이후 2008년까지 53년 연속 흑자를 낸 초우량 기업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성장 위주의 정책을 편 데다 세계 금융위기가 덮치면서 지난해 재무구조개선 약정을 체결했다.



● 회사를 맡은 뒤 경영이 악화돼 마음이 안 좋겠습니다.



“남편을 보낼 때가 위기였습니다. 구조조정이 잘 추진되는 것 같았는데, 그 후유증이 남은 상태입니다. 하지만 세계 전선업 시장 전망이 밝기 때문에 우리의 본업인 전선사업에 주력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헛가지를 과감하게 자르고, 메인 가지의 뿌리를 더욱 튼튼히 해 제조·건설·레저를 3대 축으로 삼을 계획입니다. 스마트그리드(지능형 전력망)와 초고압 전력망 사업을 새 성장동력으로 삼아 해외 경쟁력을 강화해 보려고 합니다.”



● 주부로 지내다 사회에 나오셨는데요.



“남편은 생전에 부부동반 모임에서 내가 실수를 하면 집에 돌아와 일러 줬어요. 그땐 그 말이 듣기 싫었는데, 지금 사회생활을 하는 데 밑거름이 됐습니다. 예의를 벗어나지 않고 일정 선을 지키면서 신뢰를 쌓는 방법을 배웠다고 할까요. 야채, 과일을 키우는 비닐하우스에 비유하자면 홀로 된 여성 기업가는 갑자기 비닐 보호막이 없어지는 거예요. 여과 없이, 진정한 충고를 하고, 격려하고, 칭찬해줄 사람이 없어요. 잘못이 그대로 노출되니 외롭고 쓸쓸한 자리예요. 스스로 자생력을 키우고, 들국화나 잡초가 될 수밖에요.”



● 설 회장께서 어떤 경영 유산을 물려주셨나요.



“사람을 늘 강조했습니다. ‘측근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써야 한다’는 말이 기억에 남아요. 그래야 서로 윈-윈(win-win)할 수 있다는 겁니다. 리더는 구성원에게 원대한 꿈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도 강조했어요. 그 꿈을 한곳으로 응집시켜 전력 질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리더의 역할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도 임직원들이 조직에 몰입하고, ‘같이 일하고 싶은 사주’라는 마음을 갖고 최선을 다하고 싶게끔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대한전선은 2005년 종업원 지주제를 도입했다. 전 직원에게 연봉의 50%에 해당하는 회사 주식을 나눠줬다. “조직에 대한 몰입과 충성은 주인의식에서 비롯된다”는 경영철학을 실천했다. 설 회장 타계 후 양 명예회장과 두 아들은 당시 최고액의 상속세(1355억원)를 자진 납부하기도 했다.



양 명예회장은 기업인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신발 신화’를 일궈낸 국제그룹 양태진 창업주의 막내딸이며,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의 동생이다. 1949년 부산에 세워진 이 회사는 ‘왕자표 고무신’으로 이름을 날렸고, 60~70년대에는 신발 수출 붐을 타고 성장 신화를 썼다. 한때 재계 7위였으나, 5공 때 권부의 미움을 사 공중분해됐다.



● 기업의 흥망성쇠에 대한 감회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큰아이가 돌 때쯤 국제그룹이 그렇게 됐습니다. 출가 외인이라 친정 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오빠를) 가끔 만나면 원대한 꿈을 얘기하셨는데….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네요. 생각하기에 명쾌하지가 않아요. 그런데 떠난 기업을 되찾아온다는 게 쉽게 되겠습니까. 새로운 주인을 만나서 사업이 번성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 경영 DNA는 타고난 거 아닙니까.



“어렸을 땐 공장이 놀이터였어요. 직원들은 늘 집안에 들락거렸고요. 당시엔 집이 회사고 회사가 집인 분위기였죠. 아버지는 고무신 신제품이 출시되면 가장 먼저 그걸 신어보셨어요. 양복에 안 어울리는 걸 알면서도 늘 고무신을 신었지요. 어머니는 회사 식당을 운영했어요. 자연히 밥상에선 회사 이야기가 종종 화제에 올랐습니다.”



● 그런데 음악(서울대 음악학과)을 전공했습니다.



“우리 집이 무척 컸어요. 6·25 때 피란민이 몰려오자 아버지가 방을 내주었습니다. 그중 한 가족이 오르간을 들고 피란을 왔어요. 그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어요. 경남여고 시절엔 비행기와 기차를 타고 서울의 유명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을 정도로 집에서 든든하게 뒷바라지를 해줬어요.”



● 신데렐라처럼 자랐는데, 힘들었던 경험이 있습니까.



“결혼 후 12년간 불임이었어요. 스물셋에 결혼해 서른다섯에 큰아이를 낳았어요. 양가 부모님의 기대와 걱정이 커서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기적같이, 의학의 도움 없이 아이가 생겼어요. 남편을 일찍 여읜 것도 제겐 큰 시련이었습니다.”



●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제게는 음악이 위로이자 희망이었죠. 우울하고 괴로울 땐 피아노를 열심히 쳤습니다. 10~20분 지나면 잡념이 사라지고 평온을 찾습니다. 음악이 갖는 긍정과 치유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모릅니다. 요즘엔 뮤지컬 ‘맘마미아’ 속 노래를 외우고 있어요. 인생의 고비를 넘는 과정에서 중요한 건 의지할 수 있는 테마를 찾는 겁니다.”



● 같은 이유로 문화사업을 하는 건가요.



“네. 긍정과 치유의 에너지를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습니다. 해마다 8월 전북 무주 리조트에서 여는 ‘무주 뮤직 페스티벌’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수준 높은 클래식 음악을 한다는 입소문을 타고 관객을 끌어 모으고 있습니다. 이보다 작은 규모로 1~2주에 한 번씩 ‘토요일의 안단테’ 음악회도 열어요. 지방에 사는 소년소녀들이 음악인의 꿈을 키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제가 지방에서 자라서 문화에 대한 갈증을 잘 알거든요.”



● 댁에서도 음악회를 연다고 들었습니다.



“아는 분들을 초대해 맛있는 식사와 좋은 음악을 대접하면서 소통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시작했어요. 전문음악인들이 연주를 하고, 저도 피아노를 치고, 손님들이 함께 합창을 하기도 합니다. 중대한 결정을 수시로 내려야 하는 기업인이나 지도층들은 항상 극도의 긴장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 정신적 고단함을 잘 알기에 그분들께 휴식과 여유를 드리고 싶어요. 사회적인 이슈는 갑론을박할 수 있으니, 음악으로 서로 소통하는 거죠.”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 남용 LG전자 부회장, 이희범 STX에너지 회장, 이기수 고려대 총장, 조윤선 한나라당 의원, 윤석금 웅진 회장, 이채욱 인천공항공사 사장 등 다양한 인사들이 다녀갔다고 한다.



● 인맥이 두터운 비결이 뭡니까.



“제가 정치는 잘 모릅니다만, 재계·문화계·학계 계신 분들과는 폭넓게 알고 지냅니다. 모두 제게 훌륭한 스승이세요. 신문을 통해 상대방의 근황을 챙기고, e-메일과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안부를 전합니다. 사람에 대한 관심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 여성 리더들에게 조언할 게 있다면요.



“여성이 사회에서 불리한 여건이 아니라 오히려 프리미엄을 받는다고 생각해요. 조금 더 잘하면 같은 조건의 남성보다 더 각광받을 수 있어요. 여성이 보조가 아닌 메인이 돼서 활동하는 시대가 됐으니, 철저한 스페셜리스트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누구를 보좌하는 역할이 아니라 제대로, 뿌리내리고 일하라는 겁니다. 덧붙여 사람을 끄는 인품과 매너, 자기만의 매력이 있어야 해요. 이젠 집중력이 좋고 디테일에 강한 여성들에게 좋은 기회의 장이 열렸습니다. 여성의 감수성을 한껏 활용해 사람에게 정성을 들이면 내 편을 만들 수 있어요.”



● 좋아하는 격언이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존경하는 사회 원로께서 해주신 말씀이에요. ‘큰 나무는 항상 바람을 몰고 오는 법이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동요하지 말고 담담해라’. 기업은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아서 부침이 있게 마련입니다. 제가 결혼한 1969년 대한전선은 재계 4위였어요(2009년엔 24위). 상승세를 탈 때도 있지만 때로는 하강곡선을 그리기도 한다는 걸 늘 염두에 둬요. ‘거인의 어깨 위에 타는 난쟁이가 된다’는 말도 늘 마음에 새깁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 탈 수 있는 실력만 갖추면, 스스로 거인이 되지 않더라도 저 멀리 천 리까지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j 칵테일 >> 사진 찍는 CEO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기자에게 양귀애 대한전선 명예회장은 조그만 선물상자를 건넸다. 이탈리아 여행 중 직접 찍은 사진을 액자에 담았다고 했다. 카메라를 잡은 지 올해로 4년 됐다. 민간 연구소에서 하는 최고경영자(CEO) 과정에서 사진을 배웠다. 동료 CEO들과 정기적으로 야외 촬영 모임을 연다. 하늘·바다·나무 같은 풍경사진을 주로 찍는다. 사진을 시작한 뒤 변화가 생겼다. 사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엔 TV를 볼 때 무심했는데, 이제는 ‘아, 이렇게 앵글을 잡았구나’ 하는 게 보여요. 사람마다 보는 각도가 다 다르다는 것도 새삼 느꼈요. 다양한 ‘시각’을 경험하면서 생각의 지평도 넓어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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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름 소속기관 생년
양귀애 [現] 대한전선 명예회장
194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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