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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붉은 자본가] 류융하오 신시왕 그룹 회장

중앙일보 2010.07.24 00:01 주말섹션 12면 지면보기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어릴 적 그는 신발이 없어 맨발로 등교를 해야 했다. 스무 살이 다 되도록 신발다운 신발 한 번 신어보지 못했다. 고기는 고사하고 밥 한 번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입(口) 하나라도 줄어야 할 판이었다. 그의 셋째 형은 그런 이유로 옆 동네 천(陳)씨 집에 양자로 보내졌다.


“파산 위기에 빠졌을 때였습니다
진시황 죽이려던 자객 형가의 다짐이 떠올랐어요”

가난에 넌더리를 쳐야 했던 그 소년은 지금 약 200억 위안(약 3조5000억원)의 부호가 됐다. 10여 년째 중국 부자 리스트 10위권을 지키고 있다. 그가 거느리고 있는 기업만도 약 400개에 달한다. 류융하오(劉永好·59) 신시왕(新希望)그룹 회장의 얘기다. 중국 개혁·개방 초기였던 1982년 ‘자기 사업’을 시작했던 그는 지난해에 ‘중국 경제 30년을 바꾼 30인’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가 ‘중국 민영기업의 선구자’로 불리는 이유다. “지난 30년 ‘츠쿠나이라오(吃苦耐勞· 온갖 고생도 마다않고 일한다)’ 정신으로 기업을 일구어 왔습니다. 시대 발전에 맞춰 업종도 전환했고요. 현재 약 400만 개에 달하는 사업기업에 발전 모델을 제시했다는 게 가장 큰 보람이지요.” 류 회장은 최근 이뤄진 e-메일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출발 개혁·개방이 시작됐다고는 하지만 1980년대 초 쓰촨(四川)은 여전히 시장경제와는 거리가 먼 곳이었다. 그 척박한 환경에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궁금했다.



“1980년 대학에서 기계를 전공한 둘째 형 융싱(永行)이 라디오 수리점을 차렸습니다. 설 명절에 조카에게 돼지고기를 사 먹이고 싶다는 게 이유였지요. 거리에서 라디오를 고쳐주고 돈을 받았습니다. 설 전후 7일 동안 했는데 300위안을 벌었어요. 당시 형 월급의 10배나 되는 거금이었습니다. 아, 돈이 되는구나 싶었지요. 우리 형제들은 그때부터 장사할 궁리를 했습니다. ‘자본주의의 길’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지요.”



그의 집은 4형제였다. 장남이 류융옌(劉永言)이었고, 둘째 융싱(永行), 셋째 융메이(永美), 막내가 융하오(永好)였다. ‘언행이 맑고 반듯해야 한다’는 뜻에서 ‘言·行·美·好’로 지었단다. 셋째 융메이는 양자 집 이름인 천위신(陳育新)으로 불리기도 한다.



1982년 초 4형제는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각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장사에 나선 것이다. 류 회장 역시 38위안 월급을 받던 교사직을 그만뒀다. 형제는 고철·손목시계·자전거·흑백TV 등 돈 되는 것이면 다 팔았다. 그렇게 마련한 자금이 1000위안. 창업자금이었던 셈이다.



“지금으로 치면 약 10만 위안(약 1780만원)정도 됐을 겁니다. 무엇을 할까 고민했습니다. 자금이 적게 들면서도 수익성 높은 사업을 찾다가 결국 선택한 게 메추라기였지요. 메추라기를 부화시켜 키우면 알도 얻고, 식용으로도 팔 수 있으니까요. 우리 형제는 광주리에 메추라기와 메추라기 알을 들고 직접 시장에 나가 팔았습니다. 시장에서 옛 제자를 보고는 민망하기도 했지요. 그래도 메추라기 늘어가는 재미로 어려움을 몰랐습니다.”



류씨 형제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그들은 부화기도 스스로 제작했다. 1983년 말 농장의 병아리와 메추라기는 6만 마리로 늘어났다. ‘메추라기 대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시련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그들에게도 고난이 닥쳐왔다. 1984년의 일이다.



“그해 4월 한 유통상이 병아리 10만 마리를 주문하는 거예요. ‘웬 떡이냐’ 싶었지요. 부화기 시설을 대대적으로 늘리고, 돈을 빌려 계란을 사왔습니다. 우선 2만 마리를 부화시켜 넘겼습니다. 그러나 유통상은 병아리를 받기도 전에 파산했습니다. 돈을 받을 수 없었지요. 절망이었습니다. 수만 마리 병아리가 부화기에서 태동하고 있었고, 빌린 돈의 상환 날짜는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하루아침에 파산 직전으로 몰린 겁니다.”



류 회장은 양쯔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느냐, 아니면 멀리 신장(新疆)성으로 숨느냐를 놓고 고민했단다. 정말이지 살고 싶지 않았단다.



“그때 ‘바람이 불어 역수는 찬데, 장사 한 번 가면 돌아올 길 없네(風蕭蕭兮易水寒,壯士一去兮不復還)’라는 글귀가 생각났습니다. 자객 형가(荊軻)가 진시황 살해를 위해 떠나며 읊은 시지요. 장부가 사업을 시작했으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을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면 돌파하기로 했지요. 우리 형제들은 부화기에서 깨어난 병아리를 싸들고 청두 시내 시장에 가 팔았습니다. 팔아도 팔아도 끝이 없더군요.”



그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짐차가 달린 자전거로 4시간을 달려야 했다. 청두 시장에 도착해서는 나팔을 불어 고객을 모았다. 그러기를 한 달여. 놀랍게도 8만 마리의 병아리를 모두 팔았다. 그들 스스로도 놀랐단다. 류 회장은 “그때 시장의 힘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깨달았다”고 말했다.



◆전환 큰 고비가 지나자 다음 일은 순조롭게 풀렸다. 1986년 말 농장의 병아리·메추라기가 15만 마리에 달했다. 매일 10만 개 알이 생산됐다. 중국에서 가장 큰 양계장이었다. 일본·유럽 등으로 수출도 했다. ‘시왕(希望)’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메추라기 알에서 희망을 봤다’는 뜻이다. 그때 양계사업에 매달리던 그의 사업에 전환기가 온다. 사료였다.



“1987년 광저우로 출장을 갔습니다. 정다(正大)라는 사료공장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거예요. 다가가 이유를 물어봤더니 ‘사료를 사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전국적으로 사료 공급이 달렸던 겁니다. 이거다 싶었지요. 돌아오자마자 쓰촨에 공장을 세웠습니다. 1차 산업에서 2차 산업으로 업종을 바꾼 것이지요.”



중국 농촌의 실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값싸면서도, 영양이 풍부한 사료를 만들 수 있었다. 시왕이 화교기업이었던 정다를 밀어내고 중국 사료시장 1위 업체로 등장하는 데는 채 5년이 걸리지 않았다. 시왕은 1992년 국무원(중앙정부)으로부터 사영기업 승인을 받는다. 중국 제1호 사영기업이었다. 사영기업의 큰 물길을 연 것이다.



류 회장은 금융업에도 진출했다. 중국 최초의 민영은행인 민성(民生)은행을 설립한 것이다. 1996년의 일이다. 그는 “은행과의 ‘악연’이 민성은행 설립의 직접적인 동기”라고 웃으며 말한다.



“창업 초기 돈을 꾸려고 은행에 갔습니다. 1000위안만 꿔달라고 사정사정했지요. 그러나 시골 민영기업에 국유은행의 문턱은 너무 높았습니다. 당시 우리 형제들은 ‘언젠가 내 스스로 은행을 세우리라’ 결심을 했지요. 민영기업에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은행 말입니다.”



◆희망 배부르면 제 욕심을 챙기는 게 사람의 마음이다. 우애가 깊었던 류씨 형제 역시 다르지 않았다. 사업이 한창 날개를 달고 번창하던 1995년 초 형제 사이에 불협화음이 일었다. 경영권과 관련된 갈등이었다.



“위기를 직감했습니다. 그해 3월 나의 제안으로 긴급 이사회를 열었지요. 문을 걸어 잠그고 형제 간 토의를 했지요. 회사를 나눈 겁니다. 사업 단위를 지역별로 4곳으로 분할했고, 형제들이 고루 나눠 맡기로 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희망’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절대 싸우지 않았습니다.”



당시 합의에 따라 큰형 융옌은 다루시왕(大陸希望)으로 분리됐고, 둘째 융싱은 둥팡시왕(東方希望)으로, 셋째 융메이는 화시시왕(華西希望), 막내 융하오는 신시왕(新希望)으로 거듭났다. 각 형제는 맡은 지역에서 사료·양계 등의 사업을 지속하는 한편 새로운 분야로 뛰어들었다. 그러면서도 지분교환을 통해 협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모자라면 채워주고, 넘치면 흘려주었다.



류 회장의 검소한 생활은 현지에서도 유명하다. 비행기는 이코노미 클래스를 고집하고, 10년 전 다녔던 이발관을 아직도 이용한다. 별일이 없는 한 점심은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함께한다. 골프는 물론 술·담배·마작도 할 줄 모른다. 그의 비서인 궈야씨는 “하루 12시간 일하는 것밖에 모른다”며 “류 회장의 유일한 취미는 공부(學習)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류 회장은 이런 답을 보내왔다. “재부(財富)는 과정입니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맛보는 즐거움, 그게 돈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만이 그 즐거움을 맛볼 수 있습니다.”



한우덕 기자






신시왕(新希望)그룹



중국 최대 농업·사료·식품 기업. 이 밖에도 화공·자원, 부동산·건설, 금융·투자 분야 사업이 있다. 전체 매출 약 510억 위안(약 9조원)에 달한다. 특히 중국 최대 민영은행인 민성(民生)은행의 최대주주다. 400여 개 산하기업이 있으며 직원은 6만여 명에 달한다.






j 칵테일 >> 형가와 진시황



風蕭蕭兮易水寒 풍소소혜역수한



壯士一去兮不復還 장사일거혜불부환



천하통일을 앞둔 진시황(BC 259~210)은 진(秦)나라를 제외한 만국의 적(敵)이었다. 천하의 수많은 자객들이 그의 목을 노렸다. 북쪽 연(燕)나라의 검객 형가(荊軻·?~BC227·그림)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준비를 갖춘 형가는 진나라 수도 함양(咸陽)을 향해 길을 떠난다. 죽음의 길이었다. 진시황 시해에 성공해도, 실패해도 그는 죽어야 할 몸이었다. 형가는 현재 허베이(河北)성에 있는 역수(易水)를 건너며 시(詩) 한 수로 그 마음을 전한다. 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



바람 불어 역수는 찬데, 장사 한 번 가면 돌아올 길 없네…. 형가는 진시황 접견에 성공한다. 진나라를 배신하고 연나라로 투항했던 번어기(樊於期) 장군의 목과 연나라의 지도를 가져간 덕택이다. 진시황이 지도를 펼치는 순간 감춰둔 비수가 나타났다. 형가는 비수를 들어 진시황을 찔렀으나 칼은 소매 옷을 베고 만다. 형가는 쫓고, 진시황은 쫓기는 상황이 한동안 연출됐다. 그러나 진시황이 정신을 차려 칼을 뽑아 대응했고, 형가의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사기(史記)』는 ‘형가가 여덟 곳에 상처를 입고 기둥에 기댄 채 크게 웃으면서 죽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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