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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컴을 닮고 싶은'걸' (Girl)

중앙일보 2002.08.22 00:00 종합 36면 지면보기
그렇다고 결코 거창하지 않다. 감독의 생각을 강요하는 부담스런 작품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가볍다 싶을 정도다. "아무리 코미디 축구 영화지만 너무 웃기려는 것 아니야"라고 꼬집을 수 있다. "월드컵 후광 효과에 기대려는 계산이 앞선 건 아닐까"라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그것도 데이비드 베컴이라는 영국의 축구 영웅을 제목에 인용하면서까지 말이다.


축구스타 꿈 두 소녀 편견 가득한 英 사회 묘사 경박하지 않은 코미디物
새영화 '슈팅 라이크 베컴'

하지만 이런 의심은 기우에 불과하다. 올 부천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될 만큼 작품성을 검증받았고, 원산지 영국에서도 지난 4월 2주 연속 박스오피스 정상에 오르는 성적을 기록했다.



'슈팅 라이크 베컴'은 지난해 개봉됐던 '빌리 엘리어트'에 견줄 수 있다. '빌리 엘리어트'가 발레리노를 꿈꾸는 소년의 희망을 담았다면 '슈팅 라이크 베컴'은 축구 스타를 그리는 소녀의 꿈을 담았다. 성을 둘러싼 상식적 통념을 파괴하는 기획 의도가 유사하고, 또 그 밑에 영국 사회의 각종 모순을 모나지 않게 녹여내는 연출력도 엇비슷하다.



'슈팅 라이크 베컴'은 '빌리 엘리어트'에 비해 하나는 잃고, 하나는 얻었다. 영국 하층계급의 고단한 삶을 충실하게 반영한 '빌리 엘리어트'의 진중함을 일정 부분 포기한 대신 관심사를 인종·세대·남녀 등으로 확대, 보다 경쾌한 웃음 제시에 주력한 작품이 '슈팅 라이크 베컴'인 것이다.



이 영화는 소화불량에 걸릴 위험성이 거의 없다. 푸른 그라운드를 누비며 언제간 미국 여자 프로축구 리그에서 누빌 것을 소망하는 두 소녀의 역경과 우정이 쏙쏙 들어오기 때문이다. 언뜻 만화를 보는 것 같은 상쾌한 에피소드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또 그 틈새로 번져나오는 숱한 갈등, 즉 "언젠가는 베컴에 필적하는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두 소녀의 외통수 고집과 "여자가 경망스럽게 다리통을 내놓고 공을 차느냐"고 말리는 가족 사이에 빚어지는 불협화음이 폭소와 반성이란 '성찰적 웃음'을 선사한다.



'슈팅 라이크 베컴'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선머슴애와 어울리며 공원에서 공을 차는 인도계 영국 소녀 제스(파민더 나그라)와 오매불망 프로축구 리그를 향해 달리는 백인 소녀 줄스(키이라 나이틀리)가 주인공이다. 주변 인물은 요약컨대 이들의 '적'이다. 요리·가사 등 인도의 전통적 여성상을 내세우는 제스의 부모, 외모와 결혼에만 시선이 집중된 제스의 언니, 축구 때문에 딸이 남자를 만나지 못할까 걱정하는 줄스의 부모 등이다.



영화는 제스의 재능을 알아챈 줄스가 제스를 소녀 축구팀에 끌어들이며 일어나는 '웃음 반 울음 반'의 에피소드로 채워진다. 인도계 출신인 여성 감독 거린더 차다는 인도계 영국인과 영국 중하층의 일상을 세밀하게 포착하면서 영화가 개그식 코미디로 떨어지지 않도록 유념했다. 같은 축구영화지만 저우싱츠(周星馳) 감독·주연의 '소림축구'보다 품격이 있어 보이고, 사람 냄새도 진득하게 배어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감독은 여기에 선수로선 실패한 소녀축구팀 감독과 제스·줄스 간에 발생하는 3각 관계를 삽입하고, 웬만한 선수들에 뒤지지 않는 소녀들의 화려한 드리블과 멋진 슈팅, 그리고 고된 훈련 모습을 곁들이며 흡입력을 증폭시켰다.



하지만 영화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다. 축구를 하는 소녀란 아이디어가 새롭고, 축구를 통해 영국 사회의 편견을 벗겨내려는 뜻은 칭찬할 만하나 두 소녀를 '달려라 하니'처럼 몰고 가는 까닭에 '현상'은 있되 '분석'은 미흡한 반쪽의 사회 드라마에서 정지했다. 예컨대 막바지 부분, 이루지 못한 크리켓 선수의 꿈을 대물림하듯 딸을 미국으로 보내는 제스 아버지의 갑작스런 각성이 당혹스럽다.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를 두 시간 가량 끌다 보니 뒤로 갈수록 집중력 또한 떨어지는 것 같다. 30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note]



비행기 승무원 복장의 제스 아버지는 집안에서도 유니폼을 벗지 않는다. 왜? 인도계 영국인이 최고로 성공한 직업이 승무원이요, 실내에서도 작업복을 벗지 않는 건 자신의 직업이 그만큼 떳떳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영화 속엔 이같은 잔잔한 재미가 숨겨져 있다. 상다리가 다 부러질 만큼 딸의 결혼식을 성대하게 치르는 인도인의 관습도 드러난다. 눈이 밝다면 신나게 몸을 흔드는 감독의 우람한 모습도 발견할 수 있다.





'슈팅 라이크 베컴'(원제 Bend it like Beckham)은 크게 보면 문화 충돌을 다룬 영화다. 영국인과 인도인의 가치관이 부닥치고, 부모와 자녀의 생각이 크게 엇갈린다. 특히 "여자라는 이유로 축구를 할 수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남녀의 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을 강슛에 실어 날려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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