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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지리산의 숨은 적들 (135) 반란의 아침

중앙일보 2010.07.21 02:02 종합 10면 지면보기
경찰이 14연대 반란 사건 주동자들의 입에 오른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앞에서도 좌익의 움직임을 설명할 때 잠깐 소개했지만, 해방 뒤로 별로 좋지 않았던 경찰과 군의 사이는 심지어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한 다음에도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요인은 먼저 라이벌 의식이었다. 전반적으로 미군정은 경찰력을 우선적으로 신뢰했다. 군은 아직 충분히 조직되지 않아 활용하기에는 시간이 한참 더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그에 비해 일제 때 활동했던 인력이 많았고, 무기체계와 조직체계를 훨씬 잘 갖춘 상태였다.


병사들 눈앞에서 4명 처형 … 반란 반대는 곧 죽음이었다

그래서 미군정은 당장 운용하기 쉬운 경찰력에 훨씬 많은 지원을 했다. 실제 군이 아직 조직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남한의 치안과 경비는 경찰이 수행했고, 군은 그저 그들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렀다.



그리고 군에서 흔히 보였던 조직 내의 갈등이 경찰에선 적었다. 경찰에 들어간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사회주의에 기운 사람이 거의 없었다. 조직 자체와 주요 간부들이 여러 가지 점에서 우익의 보수 성향을 강력하게 띠고 있어서 좌익이 발붙일 곳이 없었다. 그에 비해 군은 달랐다.



국군 14연대의 좌익 주동자들에 의해 벌어진 반란 사건은 1948년 10월 20일부터 10여 일 동안 이어졌다. 여수와 순천을 휩쓴 좌익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건이 막바지로 접어든 10월 27일 여수 시민들이 반란 진압군인 국군의 통제에 따라 공터에 모여 있다. [중앙포토]
나중에 자세히 소개하겠지만, 군 장병은 미군정의 선서(宣誓) 절차만을 잘 치르면 군문(軍門)에 들어섰다. 여기에는 미국의 문화가 작용했다. 미국인들은 말을 중시했다. 선서라는 절차에서 자신의 입장을 밝히면 그대로 ‘통과’시키는 문화였다. 신(神) 앞에서 행하는 맹세로 모든 것을 처리하는 미국 기독교 문화의 소산이었다. 군은 그래서 위장한 좌익이 들어서기 한결 쉬웠다. 해방 뒤에 난립한 좌익의 군사단체 인원들은 그런 과정을 거쳐 장교와 사병으로 군문에 들어섰다. 이들이 일제 때 활동했던 사람이 많았던 경찰을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해방 뒤로부터 건국 전까지 이런 군경의 충돌은 전국 각 지역에서 빈발했다. 제주 4·3 사건 초기에 군은 제주도 주민들이 현지의 경찰에 대한 반감에서 사건을 벌인 것으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어쨌든 군과 경은 물과 기름처럼 처음에는 서로 잘 어울리지 못했다. 여수의 반란 사건에서 주동자인 지창수 상사 등이 “경찰이 우리를 습격할 것”이라며 경찰을 앞에 내건 것은 군과 경찰 사이의 그런 갈등을 이용하기 위한 의도였다.



14연대 반란이 일어나기 전인 그해 9월 말 무렵, 구례에서 여수 14연대 휴가병이 경찰과 충돌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휴가병 4명이 구례의 한 이발소에서 구례경찰서 형사들과 충돌해 그들을 폭행하고서는 집에 가서 자다가 밤중에 몰려든 경찰들에게 끌려가 모질게 당한 사건이다. 그 뒤에도 서로 충돌 기미를 보였던 군경은 서로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다. 좌익의 지창수 상사는 이 점을 노렸고 전후 사정을 짐작하지 못하는 병사들은 그에 호응하고 나섰던 것이다.



14연대의 반란 주동자는 지창수를 비롯한 연대 내의 좌익 하사관 그룹이었다. 이들은 연대 병력이 연병장에 집결하자 무장한 자신의 조직원들을 연병장 주변에 배치했다. 좌익들의 수법은 교묘하면서도 대담하다. 이들은 자신들이 선동 연설을 할 때 적극적으로 그에 찬동하지 않거나 반대를 표명하는 하사관들을 시범적으로 끌어냈다. 그런 하사관 4명을 그 자리에서 즉결 처분했다고 한다.



영문도 모르고 연병장에 달려나왔던 병사들의 눈앞에서 하사관 4명을 총살시킴으로써 그들은 연병장의 분위기를 일거에 휘어잡았다. 게다가 좌익 하사관들은 경찰에 대한 증오감을 부추겼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모여들었던 14연대 병사들은 자정 무렵에 풍긴 피비린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14연대도 나름대로 좌익이 들어서기 쉬운 환경에 있었다. 14연대는 48년 5월 광주 주둔 4연대에서 갈라져 나와 새로 편성한 부대였다. 광주 4연대는 활동이 가장 거셌던 남로당 전라남도 도당의 영향을 받아 좌익의 침투가 많았다. 당시 국방경비대의 어느 연대보다도 좌익이 많았던 상황이었다.



광주 4연대 지휘부는 좌익 성향을 띤 장병을 새로 편성하는 여수의 14연대로 대거 내보냈다.



이들이 무장을 했다. 무기고의 자물쇠를 간단한 총격으로 부순 뒤 소총과 탄약을 꺼내 손에 쥐었다. 그들은 일단 여수 읍내를 향해 진출했다. 지창수 등 좌익 주동 하사관 그룹이 연병장에 모였던 병사들을 향해 외쳤던 대로 이들은 일단 여수 읍내의 경찰서를 노렸다.



14연대의 지도부는 조직적인 대응을 전혀 할 수 없었다. 연대장은 반란이 일어난 뒤에 여수읍의 한 여관에서 갇혀 지내다가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찾아온 장교 한 명과 함께 겨우 탈출에 성공했을 뿐이었다. 1대대 병력을 제주로 싣기 위해 접안 중이었던 LST 선박이 반란이 일어난 직후 바로 기관총 사정권을 벗어난 해상으로 옮긴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승선한 사병 43명과 7만4000여 발의 실탄 등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벽 1시쯤 반란군은 읍내에 진출했다. 여수 경찰서는 200여 명의 경찰력을 동원해 저지선을 형성하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여수에는 드디어 피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좌익 세력이 외치는 “인민공화국 만세” 소리가 차갑고 어두운 여수의 새벽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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