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때 오늘] “사람이 곧 하느님” 외친 천도교 지도자 최시형 처형당하다

중앙일보 2010.07.21 00:49 종합 33면 지면보기
 
  1898년 관헌에 체포된 직후의 최시형(崔時亨·1827~1898). 일찍 부모를 여의고 머슴살이의 서러움을 맛본 그는 동학의 평등사상에 공명했다. “사람은 하늘이라 평등이요 차별이 없다. 사람이 인위(人爲)로 귀천을 가리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다(『천도교서(天道敎書)』).” 그의 가르침은 우리를 소스라쳐 깨어나게 하는 정문일침(頂門一鍼)으로 내리 꽂힌다.
 
1860년 중국 천자가 영·불 연합군에 쫓겨 이 땅으로 도망 온다는 유언비어가 퍼져 민심이 흉흉하던 그때. 최제우(崔濟愚)는 천자의 뒤를 따라 쳐들어 올 서구의 침략을 막아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도로 동학을 창도했다. “사람이 곧 하느님이다(人是天).” 인간과 하느님을 동격으로 보는 그의 평등 사상은 철저한 신분사회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에게는 커다란 위협으로 비쳐졌다.

1864년 3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그가 처형된 후, 지도자의 직임을 이어받은 최시형은 지하로 숨어들어 재기를 꿈꿨다. 위정척사(衛正斥邪)의 물결이 전국에 몰아치던 1880년 그는 최제우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그리고 이듬해에는 『용담유사(龍潭遺詞)』를 펴내 포교의 기반을 다졌다. 외세의 힘을 빌려 급격한 근대화를 추진했던 갑신정변의 역풍으로 보수의 물결이 넘실거리던 1884년 12월. 교장(敎長)·교수(敎授)·도집(都執)·집강(執綱)·대정(大正)·중정(中正)의 육임(六任)제도를 두어 교단을 정비하고, 1887년에는 충청도 보은 땅에 도소(都所)를 두어 교세를 확장했다. 사이비 종교라는 오명을 벗기 위해 마음을 썩이던 그는 1892년 최제우의 복권과 동학에 대한 탄압 중지를 요구하는 교조신원(敎祖伸寃)운동에 나섰다.

이듬해 열린 보은 취회(聚會)는 종교운동 차원을 넘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높이 내건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으로 진화했다. 1894년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군 1차 봉기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반일 의병의 성격을 띤 2차 봉기 때 북접(北接)군 10만여 명을 이끌고 일제에 맞서 죽창을 높이 들었다. 의거가 실패로 끝난 뒤 피신 중이던 1898년 밀고로 잡힌 그는 그해 7월 19일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기독교 최고의 전도사이자 사상가였던 사도 바울마냥 그는 민족종교 동학을 반석 위에 올린 중추적 인물이었다. 그의 노력을 발판 삼아 동학은 이 땅의 사람 모두가 나라의 주인 되기를 꿈꾼 거족적 3·1운동을 이끈 근대종교 천도교로 거듭났다.

신분과 성차(젠더), 계급과 인종을 넘어 인간 모두의 평등과 동권을 외치는 지금. “사람이 곧 하느님이니, 사람 섬기기를 하느님같이 하라(事人如天, 『천도교창건사』)”는 그의 큰 가르침이 비수처럼 가슴을 후빈다. 여성은 “하느님을 낳은 하느님”인 존귀한 존재이며, “어린 아이도 하느님을 모셨으니 아이 치는 게 곧 하느님을 치는 것”이라 해 어린이도 어른과 동등한, 존중해야 할 인격체임을 일깨운 그의 선견(先見)이 우리의 미몽을 깨우는 죽비 소리로 다시 울리는 오늘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