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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기억하지 않는 정치’는 민주주의의 위기

중앙일보 2010.07.21 00:44 종합 33면 지면보기
대의제 민주주의가 위기에 직면해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인 국회와 선거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해소하고자 도입된 직접 민주주의적 제도들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의제 민주주의를 침식하고 있다. 악순환의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지 않고 원점으로 돌아가 선거와 국회 및 정당 기능을 어떻게 강화할까를 진지하게 고민할 때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에서 시작해 일본에서 꽃을 피우고 한국에 도입되기 시작한 매니페스토 운동은 우리 사회에 큰 함의(含意)를 제공한다. 매니페스토 운동은 선거를 중심으로 국회와 정당 기능을 강화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정치인은 국민에 대해 무엇을 할 것인지 약속(公約)을 하며, 국민들은 이를 판단해 일정한 공약 패키지를 선택한다. 당선된 정치인과 선택된 공약은 국민들의 위임으로 간주되며, 정치인은 이를 실시하는 과정에서 국민에게 보고할 의무(석명 책임성·accountability)를 진다. 그리고 다음 선거에서 국민들은 그러한 의무 이행에 대한 평가를 기반으로 책임을 따진다. 매니페스토 운동은 이러한 선거 사이클을 형성함으로써, 정당과 국회의 기능을 제고해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인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이 유지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과 정치인 모두 선거 때의 공약을 기억하고 이를 잊지 않는 것이다. 무엇보다 국민들 내에 공약은 공적인 약속이며 이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지켜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라는 인식이 공유되어야 한다. 즉 ‘기억하는 정치’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기본적 심성일 것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그만큼 공적인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며,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 주권자(국민)와 대리인(정치인) 사이의 위임관계를 확고히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에 매니페스토 운동이 정착한 것은 국민들이 선거 때 정당이 내걸었던 공약을 기억하면서 정당에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언론의 역할이 컸다. 이렇게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는 국민과 언론 앞에, 여당은 자신의 약속을 다시금 되새기며 이를 얼마만큼 실천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그 약속을 수정해야 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며 끊임없이 국민과 소통하려 노력해야 했던 것이다. ‘기억’과 ‘소통’이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한국 국민은 공적인 약속에 대한 믿음이 약하다. 이는 선거 때 제시된 공약이 제대로 실천된 적이 없다는 불신에 기인한다. 즉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이라는 믿음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에 공약은 기억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면 공약은 당선된 정치인뿐만 아니라 국민들 속에서도 잊혀져 간다. 그러기에 모든 정치적 이슈는 ‘과거’라는 뿌리를 지니고 있는데, 마치 지금 형성된 것처럼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한다.



무엇보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가 국민의 요구를 무시하고 독단적 정치를 펼친 것에 대한 반발로 정치는 국민 의사를 올바르게 반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신념을 내재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우리 국민의 대부분은 정치는 주권자인 국민의 뜻에 복종해야 할 의무(책임성·responsibility)가 있으며, 이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라고 믿는 경향이 강하다. 오랜 독재에서 벗어난 신생 민주주의 국가가 가끔 국민의 직접적 정치 참여로 불안정한 정치 상황을 연출하는 것은 아마 이런 역사적 경위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기억하지 않는 정치’가 내재화된 한국 사회에서는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부족하고, 이에 따라 국민들은 자신의 의사를 반영시키기 위해 직접 행동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 공간에 기억을 복원시켜 대의제 민주주의의 기능을 제고하려는 외국의 사례를 진지하게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곧 있으면 보궐선거가 치러진다. 한바탕의 잔치를 끝내고 모든 것을 망각할 것인가, 아니면 냉철한 눈으로 말들의 잔치를 기억하며 이를 민주주의 회복의 원점으로 삼을 것인가, 국민과 언론은 스스로 성찰해야 할 것이다.



최희식 국민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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