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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랗게 잘 익은 오이소박이에 물 붓고 간 맞춰주면 사각사각

중앙선데이 2010.07.11 04:09 174호 9면 지면보기
어느 겨울, 친구가 나한테 “요즘 오이 값이 너무 비싸. 어떻게 오이 하나에 1000원이 넘니?” 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내가 바로 “도대체 왜 지금 오이를 먹어야 돼? 내가 생각하기엔 너무 싸!”라고 맞받아쳤기 때문이다. 얘기하고 보니 나도 좀 미안했다. 오이생채나 해파리냉채 같은 것이 먹고 싶었겠지. 도시 사람치고, 사시사철 파는 오이와 애호박 같은 것들을 제철 가려 가며 먹는 사람이 몇이나 되랴.
7월이 되어야 오이는 제철이다. 즉 4월 중순에 노지에 오이 모종을 심으면, 7월 초가 되어야 첫 수확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4, 5월 내내 먹었던 오이소박이는 모두 비닐하우스에서 키워낸 것들이다.

이영미의 제철 밥상 차리기<17>여름을 시원하게 하는 오이

어설픈 시골 체험으로 이야기하자면, 오이는 키우기가 약간 까다로운 작물이다. 물을 매우 많이 먹는 식물이라 좀 가물면 시들시들하기 십상이고, 시들면 병도 쉽게 걸린다. 또 깨끗한 것은 무지하게 밝히는 식물이라, 비올 때 흙탕물이 이파리로 튀어 뒤범벅이 되면 그 이파리가 누렇게 말라버리기 일쑤다. 가장 골치 아픈 것은 진딧물이다. 상추 같은 것에는 전혀 끼지 않는 진딧물이 오이에만 다닥다닥 달라붙어 진액을 빨아먹고, 새 순은 누렇게 말라버린다. 이러니 오이 키우면서 농약을 치고 싶지 않겠는가.
봄에 심어 여름에 따먹는 제철 오이도 이런 상황인데, 겨울에 오이를 키우면 어떨지 충분히 상상이 된다. 햇볕도 충분하지 않은 비닐하우스에서 석유나 연탄으로 난방을 해 가면서 키우면, 병과 벌레가 기승을 부릴 것이고 당연히 농약도 훨씬 많이 써야 할 것이다. 비를 맞지 않고 햇볕도 제대로 받지 않으니 그 농약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지 않고 햇볕에 분해되는 양도 적을 것이다. 겨울에 오이 비닐하우스에 들어가 본 사람 말로는, 비닐하우스 안에 살포한 농약이 마치 안개처럼 자욱했단다. 그 말을 듣고는 겨울 오이를 먹을 생각이 딱 떨어졌다.
이렇게 힘들게 키운 겨울 오이가 1000원이면 사실 싼 것이다. 유기농으로 키웠다면 정말 장하다고 이야기하고 귀한 음식 먹듯 먹어야 마땅하다. 소매에서 1000원이면 산지에서는 200~300원이었을 터인데, 나보고 그 값에 키우라고 하면 난 안 하고 만다.
올해는 채소 값이 모두 비싸 오이도 그리 싼 것이 아니다. 아직도 1000원에 서너 개 수준이고, 유기농 오이는 700~800원 정도다. 접으로 사면 매우 싸다. 오이지와 오이소박이 등을 해 먹을 수 있는 계절인 것이다.
개성 출신 친정집에서 맑은 음식 취향으로 커왔던 나는, 어릴 적 여름 내내 오이지 덕분에 살았다. 짜게 절여 노랗게 익은 오이지를 동글동글하게 썰어 맹물에 띄워 우려 먹는데, 지난해 겨울에 담근 짠지와 함께 대표적인 여름 음식이다. 그러나 남편처럼 남부지방 사람들은 이런 음식에 익숙하지 않다. 그 맹맹한 음식을 무슨 맛으로 먹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 후에는 오이지를 별로 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한번 하게 되면, 그때마다 인터넷을 뒤져 소금과 물의 비율을 확인해야 하곤 한다.
대신 남편과 내가 다 좋아하는 오이소박이 물김치로 절충점을 찾았다. 오이에 소를 박아 담그는 김치인데, 맑은 국물에 소박이가 둥둥 떠 있을 정도로 물이 많은 시원한 김치다. 맹물에 띄운 것은 맛이 없다면서도, 국물 전체가 시원하게 발효된 그 물김치는 아주 맛있다며 잘 먹는다. 이 물김치는 안암동의 개성집에서 먹어보고 따라 해 본 음식이었는데, 대강 엇비슷한 맛으로 성공한 경우이다. 오이소박이를 담그듯, 오이를 두세 토막을 내고 사면에 칼집을 내어 절여 둔다. 소에, 부추와 마늘 다진 것을 넣는 것까지는 보통 소박이와 똑같은데, 단 고춧가루를 전혀 넣지 않는다. 간은 까나리액젓처럼 비린내가 거의 없는 맑은 액젓과 소금을 섞어 쓴다. 액젓 대신 조선간장을 넣어도 괜찮다. 버무린 소를 오이에 낸 칼집 사이를 비집고 집어넣는다.
이 음식의 키포인트는, 어떻게 하면 오이를 무르지 않게 하느냐다. 오이김치는 익으면서 속이 말캉하게 물러버리는데, 싱거울수록 쉽게 무른다. 고춧가루를 넣는 오이소박이야 간이 짭짤하니 그다지 쉽게 무르지 않지만, 물을 많이 넣어 싱겁고 시원하게 담그는 물김치는 오이가 물러져 망치기 십상인 것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은, 애초에 담글 때는 물을 거의 넣지 않고 짜게 담그는 것이다. 즉, 국물 전체에 넣을 소금과 액젓을 다 넣되, 물은 붓지 않고 짠 상태로 익히는 것이다. 마치 오이지가 익듯 짜게 절여진 오이는 무르지 않고 그대로 노랗게 익는다. 이때 오이가 뜨지 않도록 돌멩이나 접시로 눌러 놓아야 고루 잘 절여지고 잘 익는다.
소박이 오이가 노랗게 익으면, 그때 물을 부어 간을 맞춘다. 그리고 냉장고에 넣어 며칠 동안 숙성시킨다. 이렇게 하면 오이는 거의 무르지 않는다. 잘 익은 슴슴한 국물에 소박이 오이가 둥둥 떠 있어, 마치 동치미 국물 먹듯 시원한 맛으로 먹을 수 있다.
절여 두고 소 박고, 이런 절차가 귀찮다면, 가장 쉬운 것은 깍두기 방식이다. 오이를 먹기 좋을 만한 크기로 썰어, 그대로 액젓과 소금, 고춧가루, 부추 썬 것, 마늘 등을 넣어 버무린다. 발효된 후의 감칠맛을 위해 약간의 설탕을 넣는 것이 좋은데, 무 깍두기에 비해서는 아주 조금만 넣어야 한다. 버무려 놓은 이 오이김치는 하루가 지나면 다 절여져 국물이 많아지고 익기 시작한다. 오이 건더기가 국물에 뜨지 않도록 접시로 눌러 놓아야 하고, 익기 시작하면 뒤적여서 아래와 위의 위치를 바꿔 주는 게 좋다. 그래야 고루 잘 익는다. 적당히 익으면 냉장고에 넣어 두고 먹는다. 아무래도 이런 김치는 오래 두면 무르고 맛이 없어지므로, 한 번에 많이 하지 말고 조금씩 자주 해 먹는 것이 현명하다.




대중예술평론가. 요리 에세이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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