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숟가락 소리만 듣고도 팀 분위기 읽는 ‘족집게’

중앙선데이 2010.07.11 02:31 174호 4면 지면보기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 2대1로 진 뒤 박지성을 위로하는 허정무 감독. [포트앨리자베스=연합뉴스]
1992년 1월 10일 데니스 그린이 미국프로풋볼(NFL) 미네소타 바이킹스 감독으로 취임했다. 한 기자가 “코치가 돼서 아쉬운 점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다. 그린은 “더 이상 ‘코치’를 할 수 없게 된 점”이라고 말했다. 말장난이 아니라 촌철살인이다. 한국에서는 코치가 감독을 보조하는 지도자지만 미국에서는 대개 코치가 감독이다. 한국식 코치는 ‘어시스트 코치’ 또는 ‘어시스턴트 코치’라고 부른다.

그라운드의 CEO, 축구감독의 세계

감독은 명예롭고도 고달픈 직업이다. 감독이 건사해야 할 인적 네트워크의 폭은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방불케 할 정도로 방대하다. 코칭 스태프, 구단주, 선수, 동료 감독, 에이전트, 주치의·물리치료사 등 의료 스태프, 주무·장비 담당 등 행정 지원 스태프, 축구 팬, 축구협회 혹은 리그 운영 기구, 끊임없이 팀 주위를 맴돌며 진실을 파헤치는 언론들…. 역할을 고려할 때 감독(監督)이라는 호칭은 코치보다 실체에 가깝게 느껴진다.

코칭 스태프와 하루 수십 차례 미팅
월드컵에 출전한 축구 감독의 하루를 지켜보자. 아침에 일어나면 선수들과 아침 식사를 한다. 밥을 먹는 동안에도 그는 쉬지 않는다. 선수들의 안색이나 눈빛을 살핀다. 감독들은 선수들의 얼굴빛이 안 좋으면 집에 우환이 있는지 우려할 만큼 예민하다. 달그락거리는 그릇 소리, 선수들의 웃음소리와 대화 크기에도 귀를 기울인다. 차범근 전 수원 감독은 “아침 식사 분위기를 보면 선수들의 컨디션과 팀 분위기를 금세 알 수 있다”고 했다.

감독을 돕는 코칭스태프는 기업의 ‘임원’과 같은 핵심 역량이다. 감독은 이들과 하루에도 수십 차례 미팅을 하며 목표로 삼은 실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략을 짜낸다. 데니스 그린 바이킹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 코칭을 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들이다. 감독은 이들을 ‘감독’하고, 엇갈리는 의견을 조정하고 마지막 결단을 내린다.
축구협회의 교감이 필요한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허정무 감독은 월드컵을 앞두고 축구협회에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 동안 남아공의 날씨는 일교차가 심하니, 전기 장판을 준비해 달라”고 주문했다. 히딩크 감독은 부임 후 선수단 항공 이동의 기준을 비즈니스 클래스 탑승으로 올렸다. 호텔 투숙도 2인 1실이 아니라 특급 호텔 1인 1실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선수들이 뭘 먹고, 훈련장은 어디로 할지 등등 협회 지원 스태프는 감독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를 기울인다. 언론과의 인터뷰는 감독의 비전과 목표를 천명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이용수 KBS 해설위원은 “훌륭한 감독이 되기 위한 자질과 훌륭한 선수가 지녀야 할 자질은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선수 시절의 명성이나 성공 여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물론 브라질의 마리오 자갈로, 독일의 프란츠 베켄바워처럼 스타 출신이면서도 감독으로 성공한 사람이 적잖다. 이들은 선수와 감독으로서 월드컵을 제패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선수 시절은 화려하지 않았어도 좋은 지도자가 된 사람도 많다.

비주얼 강조 시대, 패션감각도 필수
유능한 감독이 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심리적 부담과 스트레스를 조절할 수 있는 정신적 건강함, 직관적 분석력, 뛰어난 기억력, 과감한 실행력, 브레이크 없는 야망과 주변을 전염시키는 끝없는 열정…. 비주얼이 강조되는 시대적 환경 탓인지 최근에는 멋진 패션감각까지 평가 항목에 꼽히기도 한다.

크리스 브래디와 데이비드 볼초버가 쓴 90분 리더십이라는 책에는 “축구란 4만 명이 넘는 주주를 모시고 일년에 40회쯤 주주총회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월드컵이 열리면 주주총회에 참석하는 주주가 크게 는다. 한국에서는 수십, 수백만 명이 새벽 거리로 뛰쳐나와 비를 맞으며 ‘길거리 주총’에 참석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브라질의 둥가 감독과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이 성패의 기준에 대한 화두를 던져 주었다. 남미의 두 강호는 나란히 8강에서 탈락했다. 똑같은 성적이었지만 경기를 마친 후 두 감독을 바라보는 양국 주주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우승 후보로 꼽히던 브라질의 주주들은 기대를 밑도는 실적에 분노했다. 둥가는 브라질식 공격 축구에서 탈피해 단단한 수비를 바탕으로 한 효율적인 축구를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코파아메리카, 컨페더레이션스컵 우승을 이끌고 월드컵 직전에는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위까지 올라섰다. 그러나 월드컵에서 실패한 뒤 귀국한 그를 기다린 것은 해임 통보였다.

반면 마라도나는 승장처럼 추앙받고 있다. 귀국길 공항에는 대표팀을 환영하는 인파가 몰렸다. 이들은 마라도나에게 “계속 대표팀을 맡아 달라. 2011년 코파아메리카 대회에서 명예를 회복해 달라”고 외쳤다. 사실 마라도나가 남아공에서 돋보이는 전략과 전술로 승리를 이끈 경기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열정적인 키스로 선수들과 교감했다. 아르헨티나는 용감한 공격 축구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월드컵에 패자 부활전이 있다면 아르헨티나보다는 브라질 쪽이 더 우승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축구장을 찾는 주주들은 진짜 주주들처럼 냉정하지만은 않다. 그들은 승리라는 수익만을 원하지 않는다. 숫자로 환산되지 않는 열정에 훨씬 더 공감한다.

차기 감독, 허정무 그늘을 지워라
허정무 감독이 받아 든 성적표는 1승1무2패다. 두 번이나 졌지만 한국인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월드컵 첫 승리, 외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16강에 진출하는 실적을 냈다.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는 비록 졌지만 과감한 공격 축구로 ‘다음 월드컵에서는 한국 축구가 더 잘할 수도 있겠다’는 긍정적인 아쉬움을 남겼다.

조별리그에서 나이지리아에 져 탈락했다면? 허 감독은 지금쯤 엄청난 비난에 직면해 있을지도 모른다.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염기훈의 슈팅이, 우루과이와의 경기에서 이동국의 슈팅이 제대로 골망을 흔들었다면? 허 감독의 위상은 지금보다 더 높아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조중연 대한축구협회 회장은 “이번 월드컵은 허 감독도 잘했지만 이영표와 박지성의 역할이 컸다. 감독은 선수들에게 끊임없이 신뢰한다는 신호를 보냈고, 두 선수는 감독을 위해 정말 열심히 팀을 이끌었다. 사실 두 선수는 1999년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에 처음 뽑아 준 선수들이다. 아마 감독에게 보은을 한다는 심정으로 뛰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팀의 내분으로 좌초한 프랑스 대표팀을 떠올리면 끈끈하게 하나의 목표로 달려가는 팀 분위기를 만든 것이야말로 허 감독이 이번 월드컵에서 성공한 가장 큰 이유로 꼽을 만하다.

대한축구협회는 차기 감독을 고르고 있다. 허 감독이 내년 아시안컵까지 맡아 주기를 기대했지만 허 감독은 휴식을 선택했다. 허 감독의 성공에 고무된 축구협회는 또다시 국내 감독에게 지휘봉을 넘기기로 결정했다. 대표팀 감독은 바람 잘 날 없는 나무 꼭대기에서 바늘 방석에 앉은 것과 같다고 한다. 이번에는 마치 조용필 다음에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부담까지 짊어져야 한다.

한국 축구의 또 다른 4년을 맡을 차기 감독은 누가 될 것인가. 새 감독이 해결해야 할 과제는 분명하다. 전임자를 계승하라. 동시에 전임자의 그림자를 지워라. 유능한 인재를 장악하라. 동시에 자기만의 인맥을 구축하라. 장기 전략을 세워라. 동시에 늘, 한 경기도 빼놓지 말고 승리하라. 그러므로 감독은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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