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객 대하듯 마음과 정성으로 IOC 위원 사로잡을 것”

중앙선데이 2010.07.11 01:49 174호 24면 지면보기
조양호(61) 한진그룹 회장의 일상은 10분 단위로 스케줄을 소화해야 할 만큼 바쁘다. 그런데 요즘은 회사일보다 과외일이 많다. 멕시코·파나마 등을 방문해 체육계 인사들을 만나고 이달 4일 귀국한 그는 6일에는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열린 ‘유치결의대회’에 참석했다. 1년 앞으로 다가온 겨울올림픽 개최도시 선정을 준비하는 행사다. 7일부터는 사흘간 해외 각지에서 모인 컨설턴트 7명과 함께 유치 전략을 다듬고 있다. 다음 달에는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유스올림픽’에 참석할 예정이다. 조 회장은 김진선 전 강원도지사의 임기가 끝나면서 이달부터 단독으로 평창겨울올림픽유치위원장을 맡고 있다.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 위해 뛰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결의대회 후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조 회장은 “지난해 9월 유치활동을 시작한 뒤 지구를 열두 바퀴 돌았다”고 말했다. 그는 “전체 업무의 80%가 유치위 일이고, 나머지 시간에 회사 일을 보고 있다”며 “이러다가 대한항공에서 쫓겨날까 걱정”이라며 웃었다. 조 회장은 “기업인으로서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룬 만큼 이제 사심 없이 국가에 봉사하겠다는 일념으로 올림픽 유치에 매달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대한항공을 위기에서 세계 일류 항공사로 끌어올린 ‘CES(소통·감성·시스템) 경영’을 유치활동에도 적용해 좋은 결과를 얻겠다는 것이 조 회장의 구상이다.

소통
“대륙별·국가별로 상황이 다른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들에게 일률적인 전략이 다 맞을 수가 없어요. 개개인마다 맞춤형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IOC 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두 차례 유치 과정에서 쌓은 인적 네트워크와 대한항공을 이끌며 축적한 노하우·인맥을 총동원해 표심을 잡아야지요. 그런데 2000만 명의 고객을 접할 때보다 IOC 위원 100명을 대하는 것이 훨씬 어려워요(웃음).”(인터뷰에서 유치 전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6일 서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열린 2018 겨울올림픽 유치결의대회에서 조양호 유치위원장(왼쪽)이 최민경 홍보대사, 박용성 KOC위원장과 평창 유치를 다짐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대한항공의 사내통신망 첫 화면에는 고객들이 보낸 칭찬과 불만 메시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고객의 말씀’이 자리 잡고 있다. 조 회장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이를 점검한다. 조치 사항을 직접 지시할 때도 있다. 임직원과의 소통 역시 중시한다. 조 회장은 “우리는 변해야 하고 사고방식을 바꿔야 한다”며 직위에 구애받지 말고 소통을 확대하라고 강조한다. 고객의 불만이나 언론 보도에 대해 담당자에게 직접 e-메일을 보내 상황을 묻거나 대응책 마련을 지시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소통의 단절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말 대한항공은 총체적인 위기를 맞았다. 97년 괌에서 대한항공 801편이 추락해 254명의 탑승객 가운데 228명이 숨졌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인 99년에는 화물기가 중국 상하이와 영국 런던에서 잇따라 떨어졌다. 대한항공과 동맹을 맺고 있던 미국 델타항공과 프랑스 에어프랑스는 좌석 공유를 거부했다. 미 국방부는 미군이 대한항공을 타지 못하게 했다.

이후 밝혀진 사고 조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801편의 블랙박스를 분석하자 기장의 판단이 틀렸는데도 이견을 달지 못하는 안타까운 조종실의 상황이 그대로 전해졌다. 새벽에 괌 공항에 접근했지만 활주로가 보이지 않았다. 부기장·항공기관사가 세 차례나 ‘활주로가 안 보인다. 올라가자’고 권유한 후에야 기장이 상승 명령을 내렸다. 이 몇 초가 운명을 갈랐다. 워싱턴 포스트와 뉴요커의 기자를 지낸 작가 맬콤 글래드웰은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이 사건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어 “경직된 위계질서 탓에 원활한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 조직은 심각한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썼다.

조 회장은 과감하게 소통의 장벽을 제거했다. 2001년 델타항공 출신의 데이비드 그린버그를 부사장으로 영입했다. 조종은 물론, 정비에서 운항까지 철저히 안전규정을 지키도록 했다. 그린버그는 보잉 소속의 비행 강사를 데려와 조종사들을 재교육했다. 또 조종사들에게는 영어 사용을 의무화했다. 존댓말이 있는 한국어를 쓰면 부기장이 직설적으로 조언하기보다 에둘러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50명이 조종간을 놓았다. 대한항공은 10년 동안 항공안전 개선과 항공기 교체, 기업문화 개선 등을 위해 54억 달러를 투자했다. 덕분에 대한항공은 11년째 인명사고 한 건 없다. 지난해 영국의 항공서비스 전문 리서치 업체인 스카이트랙스는 대한항공을 루프트한자 등과 같은 등급으로 평가했다.

감성
조 회장은 올 2월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코리아하우스’ 개관식에 참석한 IOC와 국제 스포츠 단체 관계자들에게 손수 맥주와 음료를 대접했다. 올림픽 기간 중 인사를 나눈 70여 명의 스포츠계 인사에게는 직접 쓴 편지를 보냈다. IOC 위원들이 ‘마이 프렌드’라고 부를 정도로 깊은 인상을 심어줬다. 조 회장은 “항공사 최고경영자(CEO)로 20여 년을 보내 서비스가 뭔지 안다”며 “고객에게 감동을 주려면 직위를 떠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으로 대할 수 있는 유연성 있는 마인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대한항공이 내놓은 올림픽 유치위원회 활동 보고서 중에서).

지난해 12월 영국 런던의 대영박물관에서는 조 회장과 닐 맥그리거 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어 작품안내 서비스 시작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프랑스 루브르, 러시아 에르미타주를 포함한 유럽 3대 박물관에서 한국어로 작품 해설을 들을 수 있게 됐다. 문화·예술 부문에 관심이 많은 조 회장이 거둔 성과다. 국내에서도 올 4월 서울 서소문 사옥 1층에 사진·미술 전시장인 ‘일우 스페이스’를 열었다. 무료로 유망 신진 작가의 작품이나 대한항공 여행사진공모전 수상 작품 등을 관람할 수 있다.

조 회장은 아마추어지만 자타가 공인하는 수준급 사진작가다. 시간만 나면 카메라를 둘러메고 국내외를 누빈다. 미국의 사립 고등학교인 쿠싱아카데미를 나온 그는 “같이 학교를 다닌 친구들이 상류층 자녀들인데도 여행 경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지금도 당시 친구들과 어울려 여행을 즐긴다.

몇 년 전에는 모텔에서 자고 햄버거를 먹으며 18일간 6000마일(9600㎞)을 여행 적도 있다. 이런 CEO의 모습은 점차 대한항공의 DNA에도 녹아들고 있다. 베트남 할롱베이, 터키 이스탄불, 중국 황산 등은 조 회장이 발로 뛰며 잠재력을 간파해 취항한 곳이다. 세계의 아름다운 여행지를 담은 대한항공의 달력은 연말이면 누구나 탐내는 선물이 된다. 2004년 도입한 새 유니폼은 이탈리아 최고 디자이너인 지안 프랑코 페레의 작품이다. 입고 일하기는 불편하지만 보기에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으며 대한항공의 세련된 이미지를 세우는 데 일조하고 있다.

시스템
“지난 두 차례의 겨울올림픽 유치전에서는 1차 투표에서 최다득표를 하고도 2차에서 떨어졌습니다. 1차에서 과반수 득표로 선정된다면 가장 좋겠지요. 하지만 2차까지 가더라도 탈락 후보도시 지지표를 끌어올 수 있는 ‘플랜B’ ‘플랜C’가 필요합니다. 기업경영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항공은 큰 방향만 제시하고 문제점만 지적해 주면 사장과 본부장이 알아서 합니다. 그래도 사상 최대 실적을 내놓지 않습니까.” (인터뷰에서 유치활동을 어떻게 끌고 갈 예정인지 묻자)

조 회장은 올 2월 강원도 평창에서 대한항공 임원 100여 명 전원이 참석하는 세미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도 그는 사업본부별로 권한을 주고 결과에 책임을 지는 시스템 경영을 다시 한번 강조했다. 경기 변동이나 지역별 시장 상황에 일일이 대응하기보다 장기적인 흐름을 읽고 꾸준히 대비해 나가는 편이 낫다는 것이다. 원칙만 정하면 누가 어떤 자리를 맡건 간에 회사는 안정적으로 돌아간다. 대표적인 사례가 항공기 도입과 항공동맹체 결성이다.

조 회장은 항공기 임대보다 구매를 선호한다. 덕분에 외환위기를 쉽게 극복할 수 있었다. 보유한 항공기 112대 가운데 임대는 14대에 불과해 자체 보유 항공기를 매각 후 재임대하는 방식으로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9·11 테러 이후의 글로벌 경기 침체에는 항공기 도입에 나섰다. 에어버스에는 초대형 항공기인 A380 5대를 주문했고, 2005년과 2006년에는 보잉과 차세대 항공기 드림라이너(B787) 10대를 비롯해 35대를 사들이는 계약을 했다. 유가 100달러 시대와 이산화탄소 배출량 제한 등 환경 규제 움직임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007년 이후 연비가 높고 친환경적인 신형 항공기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어 주문을 해도 인수하기까지 몇 년씩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항공동맹체 ‘스카이팀’ 역시 조 회장이 산파 역할을 했다. 90년대 후반 미국 유나이티드 중심의 ‘스타얼라이언스’와 아메리칸항공 주도의 ‘원월드’가 출범하자 조 회장은 제휴 항공사인 델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에어프랑스를 설득해 항공동맹체를 결성했다. 이후 알이탈리아, 중국 남방항공 등을 새 멤버로 맞아들였다. 10여 개의 전 세계 항공사와 공동 운항과 마케팅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대한항공의 운항 시스템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완전히 적응했다.

이번 인터뷰에서 조 회장은 ‘시스템 경영’의 힘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대한항공은 올 1분기 2200억원의 사상 최대의 이익을 냈다. 그에게 “(회사 경영자의) 자리를 비웠을 때 실적이 좋아서 섭섭하지는 않으냐”고 물었다. 조 회장은 “누가 있다고 해서 잘되고, 없다고 해서 안 돼서는 제대로된 조직이 아니다”고 말했다. 회사는 학습된 경영 노하우에 의해 돌아가야지 누구 한 사람이 이끌어가는 시대가 이미 지났다는 것이다.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