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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 녹이는 ‘감수성 재판’

중앙선데이 2010.07.11 01:26 174호 35면 지면보기
살인 사건 발생으로 조용했던 작은 산간 마을은 아침부터 발칵 뒤집어졌다. 밤사이 마을 주민 한 사람이 무참하게 살해된 채 뒷산에서 발견됐던 것이다. 현장에서 좀 떨어진 둔덕에 또 다른 이웃 주민의 시신이 이어서 발견됐다. 부검 결과 이 시신은 음독자살한 것으로 판명됐다. 경찰은 그 이웃이 살인을 저지른 후 바로 자살한 것으로 추정했다. 사건은 그렇게 종결 처리됐다.

2라운드가 시작됐다. 피살자 유족이 자살자 유족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1, 2심 모두 피살자 측 패소로 끝이 났다. 하지만 대법원은 여러 정황을 볼 때 자살한 사람이 살인을 저질렀을 개연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재심사를 위해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5년간의 긴 법정싸움이었다. 죽은 자들은 말이 없는데 애꿎은 산 자들만 괴로움을 주고받다 이 자리에 온 것이다. 이제 가해자 측은 상대방과 합의를 하겠다는 뜻을 타진해 왔다. 일도양단 판결보다는 원만한 타결로 쌓였던 감정의 앙금을 풀어주는 것도 고려해볼 만했다. 그러나 그간의 다툼과정에서 피해자 측 감정의 골은 매우 깊어진 상태였다. 양측을 모이게 하고 합의 조정을 주선할 판사로서는 어떻게 첫 만남의 자리를 탈 없이 이끌지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었다.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고뇌를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어떻게 하면 제대로 공감할 수 있을 것인가. 다음날 예정된 조정기일을 앞두고 시름에 밤이 깊어갔다.

지방 어느 도시에서 발생한 일이다. 김모씨는 구입한 휴대전화에 결함이 있음을 이유로 대리점에 반품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11개월 동안 끈질긴 신경전을 벌이다 드디어 그 대리점에서 멱살잡이까지 빚어졌다. 김씨는 가게 밖으로 끌려 나오는 과정에서 뺨까지 세대 얻어맞았다고 주장하면서 경찰을 불렀다. 용케 파출소에서 화를 가라앉히고 서로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하나 집에 돌아온 김씨는 그때 출동한 경찰관이 ‘사소한 일로 그렇게 흥분하나’라고 한 말을 기억해 냈다. 사그라진 분이 다시 되살아났다. 경찰관을 상대로 진정서를 제출했다. 경찰은 대리점 소란을 다시 문제 삼아 김씨를 업무방해로 형사입건했다. 검찰은 김씨를 약식재판에 회부했고 법원은 벌금 30만원을 매겼다. 그는 이어 정식재판을 청구하고 법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1년간 아홉 차례 재판이 벌어졌으나 김씨에게 유리한 증거는 없었다. 불행한 휴대전화 구입으로부터 2년이 흐른 그 겨울날 아침 원래대로 벌금 30만원이 선고됐다.

김씨는 법원 주차장에 세워 둔 자신의 차 트렁크 속에서 등유 통을 들고 나왔다. 법
정 대기실에서 등유를 자신의 몸에 뿌리고 불을 붙였다. 그는 3주 후 사망했다.

여러분은 이 비극적이고도 답답한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시는가? 그날 김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무엇일까? 김씨 자신을 제외하고 말이다. 그에게 켜진 파국의 빨간 경고등을 미리 감지하고 멈추게 할 힘이 우리에게 없었던 것일까? 그 겨울 아침 바람만큼이나 쌀쌀맞은 냉담함, 엄정 중립의 가면을 쓴 무심함만이 전부라고 한다면 우리는 출발선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법정투쟁의 질곡에 빠져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 고집불통의 불합리만을 탓하지 말고 그들의 자존심과 감성을 보듬어 줄 수 있는 배려 역시 정의가 일러주는 바 아닐까.

법원에서 분쟁을 해결하려다 오히려 정신건강을 잃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한 판결문에 이런 말을 써 보았다. “평화가 분쟁해결의 궁극의 목표일진대, 평화를 촉진시키는 데 분쟁당사자들의 정신적 안위를 안전하게 배려해 주는 것도 분쟁해결에 못지않은 중차대한 법원의 책무임을 자각하게 된다.”

조정기일에 피살자와 자살자 유족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모두들 얼굴이 상기된 채 굳어져 있었다. 어렵사리 조심스레 첫 말문을 열었다. “지난 5년에 걸친 재판으로 고생을 해 오신 여러분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우선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신 피해자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때 피해자 유족 대표를 자처하는 한 할머니가 할 말이 있다고 판사의 말을 끊고 나섰다. 아이고, 올 것이 왔구나.

“판사님. 저희는 방금 하신 말을 듣고 싶어 이 재판을 시작했었습니다. 이제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재판을 할 것이 없습니다. 판사님이 정해주는 대로 합의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할머니는 그간의 고통을 눈물로 호소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누구는 우리 보고 돈에 눈이 멀어 되지도 않는 재판을 한다고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그것만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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