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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있는 여름

중앙선데이 2010.07.11 01:30 174호 34면 지면보기
책 판매량을 보면 독서의 계절은 가을이 아니라 여름이다. 날씨로 보면 한여름이나 겨울보다 단연 가을이 독서하기에 좋다. 그런데 가을에는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널렸다. 날씨는 좋고 풍광이 멋들어지니 나들이하기도 좋고 볼거리도 많다. 수확의 계절이니 제철 먹을거리가 풍부하고 풍요의 절기인 추석이 끼어 있어 몸도 마음도 풍성해진다. 차분히 책 읽기에는 좀 바쁘다. 상대적으로 여름이나 겨울에 책 읽을 시간을 찾기가 쉽다.

공연이 그렇다. 문화의 달은 10월에 있고 공연도 가을에 쏠린다. 춥고 더운 계절은 공연하기에 부적합했다. 관객은 오가기 힘들고 예술가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공연장이 그럴 듯한 냉난방 시설을 갖춘 것도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봄가을이 공연하기에 적당한 때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불과 얼마 전까지 우리에게 공연시즌이라고 하면 봄가을이었다. 지금도 내로라 하는 예술축제들은 봄가을에 몰려있다. 필자가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하이서울페스티벌도 봄에 메인 페스티벌이 열린다(올해는 천안함 사건 때문에 가을로 연기되었다).

공연시즌이 일찌감치 정착된 서구에서는 가을부터 다음해 봄까지를 시즌이라고 부른다. 서구문화의 중심이라는 유럽의 겨울을 생각해 보라. 우중충한 날씨에 오후 4시면 해가 진다. 긴 겨울밤에 늦게까지 활기를 띠는 것은 음식점과 술집 정도다. 공연장에서 보내는 저녁은 이런 환경에서 누릴 수 있는 귀하고 큰 즐거움일 수밖에 없다. 눈비를 맞으면서까지 겨울을 중심으로 시즌을 운영하는 프로축구도 이 때문일 것이다.

서구의 공연시즌은 해가 길어지는 봄 무렵이면 마감한다. 시즌오프다. 공연도 관객도 답답한 공연장을 벗어난다. 대부분의 공연축제가 이 시즌오프 기간에 몰려 있다. 말하자면 새로운 시즌인 셈이다. 진지하고 본격적인 시즌과 달리 시즌오프는 축제 분위기가 주류다. 유럽 어디를 가더라도 이 기간에는 크고 작은 축제가 한창이다.

우리나라에서 오프시즌이었던 겨울과 여름이 새로운 시즌으로 바뀐 것도 그리 오래된 얘기가 아니다. 필자가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의 운영을 담당하던 1990년대 말 국내의 한 기획사가 러시아로부터 아이스발레 공연팀을 초청해 공연할 공연장을 찾고 있었다. 필자는 이런 공연이야말로 한여름이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역발상이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지만 찌는 듯한 한여름에 오페라하우스에서 즐기는 아이스 발레는 새로운 조합이었다. 또 하나는 그때가 오페라하우스가 한가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공연시장에서 여름과 겨울은 외면받는 기간이었다는 얘기다. 이 기간을 특히 대중적인 성격이 강한 공연들이 차지하면서 우리 공연시즌의 틀을 바꿔놓았다. 봄가을의 기존 시즌과 다른 시즌이 형성된 것이다. 이 아이스발레 공연은 올해도 8월에 한국을 찾는다고 한다.

공연에서 여름은 특별한 시기다. 날씨로 보나 국제적 관행으로 보나 정규 시즌을 가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에게 서구의 시즌개념이 맞지 않듯이 그들이 하는 대로 여름 공연장을 무더위를 피해가는 처마 밑으로 삼기에는 아깝다. 사실 시원하기로 공연장도 남부럽지 않다. 냉방장치를 틀지 않아도 그렇다. 아마도 무척 큰 부피의 큰 통 같은 구조 때문일 것이다(나는 그런 서늘하고 적막한 때의 극장이 좋다). 공연장이 한여름의 명소가 되는 것은 특별히 시원하거나 혹은 특별한 콘텐트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당연히 후자 때문이다. 여름에 공연장으로 피서 가는 것이 시원해서일 리가 없다. 여름에는 여름관객이 있고 그에 맞는 차별적인 프로그램이 있다. 올해에도 어린이연극, 공포연극, 대형 뮤지컬, 아이스발레, 야외 오페라, 축제 등 정규시즌과 다른 프로그램으로 풍성하다. 여름은 공연 보기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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