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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판문점의 공산주의자들 (127) 새로운 전장으로

중앙일보 2010.07.09 01:26 종합 10면 지면보기
여름의 더운 기운이 서서히 물러나고 아침과 저녁 무렵으로는 제법 선선한 기운이 느껴지는 가을이 다가오고 있던 때였다. 나는 회담장을 나선 뒤 다시는 그곳을 찾아가지 않았다. 전선에서 군복을 입은 채 흙냄새를 맡는 게 당시로서는 나의 천직(天職)이었던 모양이다.


“2개 사단 줄 테니 지리산 들어가라”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됐다

전쟁이 터진 뒤 두 번째로 맞는 가을이었다. 1950년의 가을은 끔찍했다. 평양을 넘어 북진해 압록강 수풍댐 점령을 위해 평안북도 운산에 도착했을 때 저들 새로운 적, 중공군은 물밀듯이 한반도에 밀려 내려왔다.



휴전회담은 초반 3개월 동안 공산군 점령지인 개성 내봉장에서 열렸다가 그 뒤 판문점으로 자리를 옮겨 진행됐다. 당시 변변한 시설이 없어 천막을 쳐 놓고 회담장으로 이용했다. 판문점 회담장 막사에서 아군과 공산 측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그 다음에 맞은 51년의 가을도 중공군과 함께 총구를 겨누고 있어야 했다. 전면에 나타나는 적이 중공군이든, 북한군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적은 반드시 무찔러 대한민국의 전선을 최대한 북상시키는 게 내 주요 임무였다.



그러나 뼈저리게 실감했던 것은 우리가 적을 너무 쉽게 풀어줬다는 점이다. 50년 가을의 중공군에 대해서는 적전(敵前) 정보를 너무 소홀히 취급하는 바람에 저들의 한국전선 참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1년 뒤에 맞은 전선 상황도 그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한 면이 있었다.



공중과 해상(海上)에서 막강한 화력 우위를 점하고 있음에도 저들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은 채 ‘휴식 시간’을 줬다는 점이다. 우리가 51년 7월 휴전회담을 시작할 무렵 북한군은 물론, 막대한 병력을 한국전선에 투입하고서도 제대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중공군도 전력에서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에게 유엔 측과의 합의에 의해 벌인 휴전협상은 ‘가뭄 끝의 단비’였다. 저들은 2~3개월 동안의 휴식기를 거쳐 이미 재무장한 채 우리 쪽 전선을 밀어 붙일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내가 이끄는 국군 1군단 주변지역에서는 끊임없이 고지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양구 지구 전투는 미 10군단 예하 미 1해병사단이 주도적으로 벌였다. ‘단장의 능선 전투(Battle of Heartbreak Ridge)’라 불리는 양구 북방의 사태리와 문등리 전투는 미 2사단을 중심으로 국군 5사단과 7사단이 좌우에 가세해 치열하게 적들과 교전했다.



많은 전선에서 끊임없이 전투가 벌어지는 양상이었다. 단지 예전의 전투들이 대규모 기동전 양상으로 벌어지던 것과는 달리 그때의 전투는 고지를 두고 서로 뺏고 뺏기는 소모전 형태로 번지고 있었다.



국군 1군단도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분투를 거듭했다. 지도를 보면 휴전선이 향로봉에서 곧장 동북쪽으로 치솟아 동해안의 해금강 남쪽으로 빠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 지역을 견고하게 지키는 것이 1군단의 임무였다. 51년 가을에 접어들면서 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11사단은 진지공사를 벌였다. 그 전선을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력하면서도 빈틈없는 진지를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 무렵이었다. 11월 중순의 어느 날 느닷없이 이종찬 육군참모총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내일 서울에 있는 미 8군사령부에서 제임스 밴플리트 사령관과 함께 만나 의논할 일이 있다”고 했다. 나는 ‘또 무슨 작전이 벌어지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이 총장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 총장은 “전화로 얘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어쨌든 나쁜 일은 아니니까 내일 서울에서 만나 얘기를 하자”고 했다. 더 이상 캐물을 수는 없었다. 다음 날 나는 군단의 비행기에 몸을 싣고 서울로 날아갔다.



동숭동에 있는 옛 서울대 문리대 건물 내 총장 집무실이 미 8군 사령관의 임시 사무실이었다. 그 집무실에서 밴플리트 사령관을 비롯해 8군 참모장 폴 애덤스 소장, 8군 작전참모 머제트 대령과 이종찬 참모총장, 그리고 내가 모두 모였다.



예상하지 못했던 주제였다. 밴플리트 사령관과 이 총장이 꺼낸 얘기는 빨치산 토벌에 관한 작전이었다. 대한민국 중남부 지역에 거대한 면적으로 버티고 있는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을 어떻게 궁극적으로 소멸시키느냐가 핵심이었다.



당시 상황은 심각했다. 전쟁을 거치면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미처 후퇴하지 못한 북한군 정규병력이 기존의 지리산 일대 빨치산 대열에 합류하면서 대한민국 안에는 지리산을 정점으로 또 하나의 ‘북한’이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밴플리트 장군은 “백선엽 장군이 게릴라전 경험이 많다고 하니 작전을 맡아야겠다”고 운을 뗐다. 그는 이어 “작전에 투입할 병력은 모두 2개 사단이다. 어느 사단을 선정할지는 백 장군 의견에 따르겠다”고 했다.



1년 전에 벌어진 이 땅 위의 전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의 전투가 벌어질 참이었다. 빨치산을 소탕하는 작전이었다. 적군인 빨치산을 한 지역에 가두고 차츰 밀고 들어가 소탕하는 작전이어서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 내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그 전에도 지리산 일대에서 늘 활동을 벌이던 게릴라들은 있었다. 대한민국 내부에서 자생한 좌익의 뿌리가 그곳에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을 없애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저들 빨치산은 민간에 깊이 파고들어와 위장에 능했고, 치밀한 안팎의 연결망을 통해 토벌을 쉽게 피해 가는 상대였다.



나는 저들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방법을 꿈꾸기 시작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병력 운용 방식이 필요했다. 작전도 차원을 달리해야 했다. 내 옆에 숨어 있는 적은 누구인가. 나는 내가 지금까지 겪은 군인으로서의 생활과 그 과정 중에 마주쳤던 내부의 적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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