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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 40년 고속도로가 미래 바꾼다 ④ 한국 도로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중앙일보 2010.07.09 00:37 종합 22면 지면보기
1968년 6월 14일 국회 건설위원회 국정감사장. 주원(88년 사망) 건설부 장관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야당 의원들의 질문 공세에 진땀을 뺐다. 경부고속도로는 4개월 전인 같은 해 2월 착공했다.


야당·일부 언론 “선거용, 히틀러 … ” 반대
40년 후 김상현씨 “참 훌륭한 결과물”

신민당 김대중·김형일 의원 등은 “고속도로 예산 편성에 법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또 공사에 수의계약이 많아 비리 소지가 높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여당인 공화당의 이현재 의원까지 야당 편을 들고 나섰다. 처음엔 목청을 높이며 강하게 나오던 주 장관도 결국은 “선처를 바란다”는 답변만 계속해야 했다. 주위에선 웃음이 터졌다.



경부고속도로 서울요금소에서 서울 쪽을 바라본 야경. 정부는 당시 한 해 예산의 24%인 429억여원을 들여 1970년 7월 7일 이 도로를 개통했다. 현재 하루 103만5000여 대의 차량이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한다. [성남=강정현 기자]
67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이 밝힌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은 처음부터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국회와 언론이 중심에 섰다. 7대 국회(1967~71년)에서 신민당은 연일 “면밀한 예산 검토도 없이 착공한 것은 헌법의 예산법정주의를 위반한 것”, “건설 계획 자체가 71년 8대 총선을 위한 전시효과”라는 비판을 쏟아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68년 국회 건설위원회에서 “전국의 도로 상태가 말이 아닌데, 지금 국가에서 외국 차관도 얻고 갖은 재원을 총동원해서 경부고속도로에 투입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언어도단”이라고 주장했다. 김영삼(YS) 전 대통령도 “좁은 국토에 무슨 넓은 길이냐”며 반대했다. 이 말은 80년대부터 김종필 전 총리 측이 선거에서 YS 진영을 비판하는 단골 소재가 됐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과정서 숨진 77명을 추모하기 위해 1970년 지금의 금강휴게소 부근에 세워진 위령탑.
헌법을 기초한 유진오 당시 신민당 당수 역시 68년 언론 인터뷰에서 ‘독재자’라는 말까지 꺼내며 경부고속도로 계획을 비판했다. 그는 “독재자 히틀러의 그 유명한 아우토반을 연상했다. 자고로 독재자는 거대한 건조물을 남기기 좋아한다”며 “경부고속도로 계획은 현 경제 실정에 비춰 사업의 우선순위에 의문을 갖게 한다”고 주장했다.



언론의 비판도 쏟아졌다. 당시 한 유력 일간지는 ‘의욕만 앞선 경부간 고속도로의 문제점’ 기사에서 “심각한 주택난 하나도 제대로 해소시킬 능력을 갖추지 못한 우리 재정 형편에 어떻게 이처럼 방대한 사업을 그나마도 4년 안에 완성시킬 수 있다는 건가”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은 이러한 반대와 각종 악재를 무릅쓰고 공사를 강행했고 도로는 2년6개월 만에 완공됐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15시간 걸리던 것을 4시간 만에 주파할 수 있게 됐다.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각종 산업단지가 들어섰고 물류비용도 획기적으로 감소했다. 말 그대로 국가발전의 기폭제이자 원동력이었다.



7대 국회 신민당 의원을 지낸 김상현(75) 전 의원은 최근 본지와의 통화에서 “그땐 반대를 많이 했는데 지금 결과를 보면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참 훌륭한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추진력, 피, 땀’의 결실=경부고속도로 건설은 64년 서독 방문 때 ‘아우토반’(고속도로)을 본 박정희 대통령이 ‘국가발전을 위해 고속도로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마음먹으면서 시작됐다. 대통령 지시로 비공식 조직을 만들어 공사를 이끌었던 당시 육군본부 조달감실의 윤영호 대령(현 신영기술개발 회장)은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더니 한쪽 벽에 갖가지 지도가 빼곡히 걸려 있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공사에는 공병대를 중심으로 한 군부대가 대거 투입됐다. 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 특수부대가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도 박 대통령은 “전쟁이 터지지 않는 한 예정대로 간다”며 밀어붙였다.



공사비는 전액 국민 세금으로 충당됐다. 공기 단축을 위해 겨울에 도로 위에 불을 질러 땅을 녹이는 비상수단을 동원했다. 중장비와 기술자도 태부족이었다. 당시 국내 보유 중장비(1600여 대)는 6·25 전쟁 전후에 도입된 낡은 것들이었다. 미국과 영국, 프랑스, 스웨덴 등의 중장비 업체에 통사정해 69년 2월 외상으로 장비를 들여왔다. 또 육사 출신 위관급 장교들을 단기 교육해 기술자로 투입하는 고육지책도 썼다.



희생도 적지 않았다. 교량과 터널 공사 과정에서 77명이 사망했다. 진기록도 세웠다. 경부고속도로 428㎞를 2년반 만에 완공한 것은 전 세계 고속도로 건설 사상 유례가 없다. 공사비(429억원)도 ㎞당 1억원으로 세계적인 ‘짠돌이’ 건설이었다.



글=김성탁·최선욱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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