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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또 다른 전쟁, 6·25 휴전협상 시작되다

중앙일보 2010.07.09 00:28 종합 33면 지면보기
 
  정전협상 중 어느 날 유엔군 측 장교가 높게 쌓여 있는 협상 기록 옆에 서 있다. 방대한 기록물은 오랫동안 치열하게 진행된 협상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정전협상이 시작되었다. 중국군의 참전 이후 38선 부근에서 공방이 계속되면서 한국전쟁 참전국들은 일방적인 승리가 어렵다는 판단 하에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에 들어간 것이다. 유엔에서 소련의 대표였던 말리크가 정전협상을 제안하고 이를 미국이 받아들이면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협상은 치열한 신경전으로 시작되었다. 유엔군과 공산군은 정전협상에 참여하는 양측 대표의 차량에 백기를 달기로 했는데, 공산군 측에서는 백기를 달고 있는 유엔군 차량의 사진을 유포하면서 유엔군이 항복했다고 선전하기도 했다. 또한 유엔군들이 공산군보다 키가 큰 것을 고려해 유엔군 대표들이 사용할 의자의 다리를 자르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협상의 과정에서도 공산군 측으로부터 유엔군 비행기가 회담장 주변에 폭격을 했다는 항의가 끊이지 않았다.

정전협상이 시작되면서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지만, 협상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개성에서 시작된 협상장은 판문점으로 옮겨졌으며, 이후 2년에 걸쳐 협상이 계속되었다. 군사분계선과 정전협정 위반 여부를 감시하는 중립국감독위원단 문제로 몇 달간 논쟁이 계속되었지만, 협상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된 것은 포로였다. 공산군 측의 유엔군 포로(1만1000여 명)가 예상보다 너무 적다는 것도 문제였지만, 북한이 남한을 점령하고 있을 때 강제로 동원한 남한 출신 북한군 포로, 즉 반공포로가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자원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중국군 포로 중에서 본토로 가지 않고 대만으로 가겠다는 반공포로가 1만4000여 명 나오면서 포로 송환은 더 복잡한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되었다. 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와 공산포로 사이에서 또 다른 전쟁이 진행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전협상이 진행되던 시기 가장 안타까웠던 일은 지금의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수많은 군인이 희생당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남과 북으로 밀고 밀리는 상황이 전체 3년간의 전쟁 기간 중 1년도 되지 않았다면, 정전협상 과정 중의 고지 전투는 2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유엔군과 공산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수많은 젊은이가 아까운 삶을 마감해야 했다.

‘배달의 기수’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장식했던 바로 그 치열한 전투들은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진행된 모순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처음으로 승리하지 못한 채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야 했던 미국과 중국이 만들어낸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2년간의 고지 전투 지역은 유해 발굴의 안타까운 현장이 되고 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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