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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lf&] 산골 소녀 이보미 US 오픈 가다

중앙일보 2010.07.09 00:28 경제 21면 지면보기
내설악 깊은 곳에 한 꼬마가 있었다. US여자 오픈 우승한 세리 언니 소식을 들은 뒤 골프에 대한 꿈을 키웠다. 매일 속초의 연습장에 가려고 미시령을 넘고 또 넘어 12년이 지난 지금 KLPGA 투어를 넘어 마침내 US오픈에 첫발을 내딛었다.



박세리가 US여자오픈에서 우승했던 1998년 여름, 그 떠들썩한 분위기는 강원도 내설악 산골까지 전해졌다. 인제군 북면 한계리에 살던 산골 소녀 이보미(22·하이마트)도 그 바람에 골프클럽을 잡았다. 그의 나이 열 살 때였다. 소녀의 집은 선녀의 전설을 간직한 백담사 인근 북천(北川)의 맑은 물가였다. 여름이면 보미는 언니, 두 여동생과 함께 멱을 감고 놀았다. 아버지 이석주(51)씨는 전기공사를 했고 어머니 이화자(49)씨는 설악산 가든이라는 식당을 했다. 이보미는 “어릴 때부터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살아서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단풍이 들면 꼬불꼬불 도로에 자동차들이 빼곡했는데 이런 걸 보러 왜 여기까지 오나 했다. 단풍이 그렇게 아름다운 건지는 도시에 와서 알게 됐다”고 말했다.



산골 소녀 이보미가 어릴 적부터 골프 클럽을 지원해 준 용품업체 MFS골프의 전시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1998년 박세리의 US여자오픈 우승으로 인해 골프를 시작한 ‘세리 키드’ 이보미는 12년 만에 최고의 무대인 US여자오픈에 도전장을 던졌다. [김상선 기자]
박세리가 우승하던 해 이보미는 원통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태권도를 배우는 중이었는데 아버지가 “박세리를 보니 골프가 괜찮은 것 같다. 골프를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그런데 보미의 아버지는 다른 학부모들과는 달랐다. 골프를 전혀 모르는데도 딸에게 무작정 골프를 배우라고 제안한 것이다.



보미는 강원도 인제의 한 연습장에서 오래돼 그립이 미끈미끈한 대여용 성인 클럽으로 골프를 시작했다. 그런데 골프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자신의 클럽을 가질 수 있었다. 고향이 강원도인 골프용품 업체 MFS골프 전재홍 사장이 강원도 꿈나무들에게 맞춤 클럽을 선물한 것이다. 이보미는 “오렌지색 샤프트가 얼마나 예쁘던지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다”고 말했다.



본격적으로 골프를 하게 된 보미는 매일 차를 타고 속초의 연습장으로 가야 했다. 덜컹거리는 엑셀 승용차를 타고 이보미는 매일 두 번씩 설악산 미시령을 넘었다. 산을 넘는 데만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 보니 이보미는 정작 설악산에는 가보지도 않았다. 이보미는 “매일 두 번씩 설악산을 넘어 다녔는데 구태여 거길 갈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속초의 골프 환경은 나쁘지 않았다. 연습장은 물론 골프장도 있었다(남자골프의 김경태·노승열 등이 속초 출신이다). 그러나 보미는 라운드를 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버지 이씨는 “그린피를 댈 돈도 없었고 골프장 사람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성격도 아니었다”면서 “그냥 연습장에서 열심히 하면 될 줄 알았다”고 말했다. 보미는 다른 아이들이 라운드를 나갈 때 모래를 넣은 군용 더플 백을 치면서 임팩트 연습을 했다.



대회에서도 그랬다. 다른 친구들은 개막 며칠 전부터 대회장에 나가 연습 라운드를 통해 코스를 파악한 뒤 경기에 나섰다. 그러나 보미는 숙박비를 아끼려고 경기 당일 새벽 집을 나왔다. 연습 라운드 같은 건 생각도 못했다.



그렇다 보니 예선을 통과하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연습 라운드 한 번도 안 해보고 어떻게 이 정도 성적을 내느냐”고 신기해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보미는 성에 차지 않았다.



이보미가 1988년생이 아니었다면 사정은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동기들은 실력이 무척 뛰어났기 때문이다. LPGA 투어를 주름잡고 있는 신지애·김송희·최나연·김인경·박인비가 모두 88년생 용띠다. LPGA 투어에서 뛰는 민나온·오지영·이일희 등도 88년생이다. 국내 투어의 김하늘과 김현지 등도 동기다.



이보미는 “동기생들은 정말 실력이 좋았다. 옷도 멋지게 입고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공을 치는 아이들 같았다”며 “실력 차가 커서 친해질 기회도 별로 없었다”고 털어놨다.



“내 모습이 초라해 보여 골프를 그만둘까 생각한 적도 있죠. 그런데 그동안 한 게 너무 아까워서 그만두지는 못하겠더라고요. 나도 그 아이들처럼 연습 라운드 해보고 대회에 나가면 잘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냥 잘하라’고만 하는 부모님이 야속하기도 했지요.”



고등학생이 되면서 사정이 좀 나아졌다. 전국체전 강원도 대표선수로 뽑혀 종종 코스에 나갈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국가대표 상비군도 됐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우물 안 개구리였다. 동기생들은 이미 프로로 전향하거나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최나연은 고등학교 1학년 때 KLPGA 투어에서 2승을 거뒀다. 신지애도 고등학교 2학년 때 프로에서 우승했고, 고3 때는 이미 KLPGA 투어에서 ‘지존’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김인경과 김송희·박인비 등은 세계를 제패하겠다면서 일찌감치 미국으로 떠났다.



이보미는 고3 때 어머니와 둘이서 수원으로 이사를 갔다.



“그래서 다짐했죠. 그 아이들보다 더 열심히 해서 이겨버리자. 신지애도 엄마를 잃은 슬픔을 딛고 저렇게 큰 선수로 자랐는데 나도 못할 게 없다. 이보미는 잘할 수 있다고 되뇌곤 했죠.”



이보미는 2009년에야 KLPGA 1부 투어에 입문했다. 최나연에 비해 5년이 늦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넵스 마스터피스 대회에서 박인비와 연장전을 벌인 끝에 프로무대에서 첫 우승을 거뒀다. US여자 오픈 우승자인 박인비는 어릴 때는 결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다. 이후 이보미는 88년생 박세리 키즈의 어엿한 일원이 됐다.



3일 이보미는 미국으로 떠났다. 여자 골프에서 가장 큰 대회인 US여자오픈에 그가 간다.



“골프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도 언젠가 박세리 언니처럼 US여자오픈에 나가겠다고 다짐했지요. 그 꿈을 이루는 데 딱 12년이 걸렸네요.”



산골 소녀 이보미가 미국에 가는 건 처음이다. 그러나 LPGA 투어 KIA 클래식에서 우승한 서희경처럼 큰일을 낼 수도 있다. 올해 KLPGA 투어에서 이보미의 기록은 독보적이다. J골프 대상 포인트 1위, 평균 타수 1위, 언더파율 1위, 이글 수 1위, 그린 적중률 1위, 톱10 확률 1위(100%), 버디 수 2위, J골프 상금랭킹 3위, 드라이브샷 거리 11위다. 퍼팅(31위)을 제외하면 모든 기록이 상위권이다. 이보미는 “그린을 양궁 표적처럼 만들어 누가 더 샷을 가까이 붙였나를 측정하면 항상 1등할 자신이 있다”고 했다.



그만큼 어프로치샷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MFS골프 전재홍 사장은 “이보미는 예쁜 외모와는 달리 근력이 대단하다. 여자 선수 중 가장 강한 샤프트를 쓴다”고 말했다. 이보미는 “어릴 때 실전 라운드를 못하는 대신 더플 백을 때린 게 도움이 된 것 같다”면서 “올해 초 샤프트를 바꾼 뒤 드라이브샷 거리가 15야드 정도 늘었다. 잘 맞으면 280야드 정도 나간다”고 했다.



이보미는 “US여자오픈이 열리는 오크몬트 골프장이 너무 어려워서 ‘괴물’이라고 불리던데 정교한 샷이 중요한 만큼 오히려 해볼 만하다. 정교한 샷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성호준 기자 kari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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