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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폭염주의보

중앙일보 2010.07.09 00:21 종합 35면 지면보기
시인 이상(李箱)의 고향은 평안남도 성천(成川)이다. 북쪽인데도 여름이 끔찍하게 더웠던 모양이다. 수필 ‘권태(倦怠)’에서 “아침이나 저녁이나 뜨거워서 견딜 수 없는 염서(炎暑)가 계속된다”며 “어두워 버렸으면 좋겠는데 벽촌의 여름날은 지루해서 죽을 만치 길다”고 탄식한다. 요즘으론 딱 ‘폭염주의보’ 상황이다.



더위에 지친 이상은 최 서방네 사랑 툇마루로 장기 두러 간다. 나름의 피서(避暑)법인데, 다산(茶山) 정약용이 제시한 여덟 가지 피서와 흡사하다. 첫째가 바로 ‘깨끗한 대자리에 앉아 바둑 두기’다. 장기나 바둑이나 몰입하면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데, 더위를 느낄 틈이 있으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다. 덥다 생각하면 더 덥고, 불쾌지수가 높다고 하면 괜스럽게 더 짜증 나는 법이다.



더위의 천적은 자연에 있다. 바람과 흙과 물과 불의 네 가지 원소(元素) 말이다. 물은 탁족(濯足)과 유두(流頭)를, 흙은 모래찜질과 동굴을 생각하면 되겠다. 불은 김치찌개든 사우나든 ‘이열치열(以熱治熱)’이다. 그러나 역시 한 줄기 바람이다. 불지 않으면, 부치면 된다. 부채 말이다. 단선(團扇)과 접선(摺扇)으로 나뉘는데, 대표적인 접선이 합죽선이다.



접었다 펴는 부채는 한국이 원조다. 육당(六堂) 최남선은 ‘고사통(故事通)’에서 “중국은 원래 단선뿐인데, 북송 때 고려에서 접선이 들어와 접는 부채가 일반화됐다”고 했다. 여기에 그림이나 글씨를 넣은 게 ‘서화선(書畵扇)’이다. 이는 팔랑팔랑 부치는 게 아니다. 감상하거나 뜻을 새기며 더위를 잊는 것이다. 특히 세한도(歲寒圖)는 조금씩 펼쳐야 한다. 활짝 펴면 너무 추워서 감기에 걸리기 쉬우니까. 그런데 요즘은 부채를 구경하기가 어렵다. 선풍기도 제치고 에어컨이다. 너무 틀어 냉방병이 만연한단다.



남부지방은 연일 폭염주의보다. 지구가 뜨거워진 탓인지, 폭염주의보도 매년 빨리 찾아온다. 2007년보다 34일, 지난해보다 3일이 빠르다. 그러다 보니 전력 사용량도 급증해 정전사태까지 우려된다고 한다. 이럴 때 부채를 쓰면 에너지 절약, 냉방병 예방, 팔 운동까지 일석삼조(一石三鳥)일 터이다.



참, 더위의 천적 원소가 하나 더 있다. 영화 ‘제5원소’의 다섯 번째 ‘사랑’ 말이다. 뜨거운 사랑도 ‘이열치열’이겠지만, ‘죽부인(竹夫人)’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폭염이라도 나라만 어수선하지 않으면 좀 견딜 수 있겠다. 불볕더위에 심화(心火)까지 더하면 어쩌란 말인가.



박종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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