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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판문점의 공산주의자들 (124) 리지웨이와의 논쟁

중앙일보 2010.07.06 01:19 종합 10면 지면보기
매슈 리지웨이 장군은 외모에서 풍기는 그대로 정신력이 강한 군인이다. 미군의 여느 장수처럼 적 앞에서는 단호함을 보일 줄 알았고, 위기 상황에서도 늘 반격을 노리며 전세를 뒤엎으려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그 때문에 1951년 1·4 후퇴로 경기도 안성까지 밀린 전선이 북상할 수 있었다. 중공군의 공세로 자칫 와해할 뻔했던 전선을 지킨 것은 그의 공로라고 봐도 좋다.


리지웨이, 어디서 뭘 들었는지 갑자기 삼국시대 운운하더니 …

그러나 우리 쪽에서 보면 늘 아쉬움을 남겼던 장수다. 눈앞의 적보다는 워싱턴의 입장을 먼저 헤아리는 그의 처신 때문이었다. 그는 결코 전선을 확대할 생각이 없었다. 한국 전선에서 미군의 희생이 더 이상 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모두 확전보다는 미군 철수를 염두에 두고 협상을 벌이는 워싱턴 미 행정부의 입장에 부응하려는 태도에서 비롯한 생각이었다.



그를 설득하는 것은 그래서 어려웠다. 공산주의자를 반드시 몰아낸다는 생각에 철저했던 더글러스 맥아더의 군인정신은 그에게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는 그에게 예성강까지만이라도 전선을 넓혀 한강 이남을 더 안전하게 확보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그의 생각은 분명히 ‘노(No)’였다.



휴전회담장은 중립지대로서 폭격받는 일이 없어야 했다. 회담장이 초반의 개성에서 판문점으로 옮겨진 뒤인 1952년 3월 미군들이 비행선 모습의 흰색 고무 풍선을 공중으로 올리고 있다. 아군과 적군의 공습 또는 포격을 피하기 위한 장치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나는 그 때문에 리지웨이 장군과 한국의 통일 방안에 대해서도 입씨름을 벌여야 했다. 나는 한반도가 통일 국가의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휴전도 통일을 전제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나 리지웨이 장군은 어디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마한과 진한·변한을 일본 발음으로 외우기도 하고, 삼국시대의 예를 들기도 하면서 “한국은 과거에도 자주 갈라져 있었다”는 주장을 했다.



그를 더 이상 설득하려고 덤비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을 했다. 논쟁을 그 정도 수준에서 접어야 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리지웨이 장군이 내 의견을 철저하게 무시한 것만도 아니었다. 그 또한 한국 전선 상황을 총괄하는 유엔군 총사령관이라는 입장에서 대한민국 정부의 생각과 한국인의 역사적 감정 등을 도외시할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그는 1951년 7월 31일 “군사분계선은 지상군과 공·해군의 전선을 고려할 때 압록강과 개성~평강 지구를 연결하는 지상군 전선 사이에서 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는 현재의 아군과 공산군의 전선 접촉선(接觸線)인 개성~평강의 현실성을 감안하면서도 제공권과 제해권을 가진 유엔군이 언제라도 북상해서 군사분계선을 더 북쪽으로 올려 설정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어쨌든 전선을 북상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은 열어 놓은 셈이었다.



중공군으로 참전했다가 포로로 잡힌 뒤 자국 송환을 거부했던 중국인 병사들이 대만으로 가기 위해 유엔군 캠프로 들어서고 있다. 휴전협정이 맺어진 뒤인 1954년 1월의 모습이다. 중국은 한국전선에서 포로로 잡힌 자국 병사들이 송환을 거부해 대만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공산 측은 휴전선을 38선으로 하자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외국군 철수에 집착을 보였다. 그러나 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중공군은 나름대로 다른 계산을 하고 있었다. 많은 병력이 한국 전선에 몰려 온 만큼 그들의 포로도 엄청났다. 그들은 그 포로 문제에 집착하는 듯한 인상이었다. 다수의 포로가 중공과 분단 상태인 대만으로 보내질 가능성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그런 상황에서의 회담은 난항의 연속이었다. 제대로 타협이 이뤄지기 힘든 양쪽의 제안을 두고 평행선이 죽 이어지고 있었다. 회담은 무료하게, 성과 없이 지속하고 있었다. 지엽적인 문제로 다툼이 벌어지고는 했다. 공산 측이 늘 즐겨 사용하는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회담은 가끔 중단됐다. 8월 4일에 중공군 중대병력이 회담장 근처인 중립지대에 들어온 것을 들어 아군 측이 회담을 중단시킨 적이 있다. 일종의 ‘무력 시위’로 간주한 것이었다. 회담장에 영향을 끼치려는 계산 아래에서 공산군 측이 시도한 심리전이었다. 그때 나는 점심시간에 대표단 일행과 함께 우리가 휴식을 취했던 인삼관 입구 계단에 서 있었다. 내 앞으로 약 300m 거리에서 중공군이 기관총과 박격포로 무장을 한 채 일렬로 행군하고 있었다. 회담장인 개성 내봉장 주변 반경 4㎞는 공산군 관할지역이었다. 가뜩이나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측 회담 대표와 실무 인원들은 그런 광경을 지켜보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강력하게 항의했고, 공산군 측은 이를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인정했다. 그들은 또 드물게 사과까지 했다. 회담은 6일 만에 재개됐다.



그 뒤에도 8월 23일부터 회담이 장기간 중단된 적이 있다. 공산 측은 유엔 공군기가 개성의 중립지대를 폭격했다는 주장을 했다. 날조였다. 그런 적이 없었음에도 그들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회담은 일방적으로 중단됐다.



미군은 워싱턴과 거의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회담장 주변에 배치한 최첨단 통신 차량에는 워싱턴·도쿄와 전문을 송수신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이를 통해 미군은 시간 지체 없이 본국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다. 그에 비해 공산 측은 통신시설이 보잘것없었던 모양이다. 회담장에서 판단을 내리기 힘든 사안은 베이징과 평양과 논의하기 위해 며칠이 걸렸다. 엉뚱하게 “미군이 중립지대를 폭격했다”고 주장하면서 며칠 동안 일방적으로 회담을 중단하는 공산군 측의 이면에는 이런 통신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회담은 끊겼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는 단속(斷續)의 상태를 계속하고 있었다. 진전이 있을 리가 없어 지루했다. 어느 날인가 “도쿄를 다녀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나를 비롯한 회담 대표 모두 함께 일본의 도쿄에 갔다 오라는 내용이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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