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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오늘] 일제 경찰, 일본 신도 세력 키우려고 무속을 탄압하다

중앙일보 2010.07.06 00:18 종합 33면 지면보기
 
  대한제국 시기의 굿판. 일제는 자기들의 전통 종교인 신도(神道)를 국교로 삼아 ‘국민’을 창출할 목적으로 신도와 종교적 메커니즘이 비슷한 한국의 기층 종교를 ‘미신(迷信)’이라는 굴레를 씌워 집중 탄압했다. [사진출처:서양인이 본 조선]
 
인류가 유랑 생활을 멈추고 지구 위의 특정 표면에 정착할 수 있게 된 것은 신석기시대 농업혁명 덕분이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은 어떤 인간 집단이 처음 정착지를 선택한 행위를 ‘최초의 선택’이라 불렀고, 이 최초의 선택이 수천 년간 변하지 않는 ‘문화의 심층’을 규정한다고 보았다.

정착 농업에 주로 의존하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대를 이어 가며 ‘하나의 집’에 눌러 살면서 ‘여러 신’을 섬기는 문화를 이룩한 반면 유목 지대나 반농반목(半農半牧) 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여러 채의 집’ 또는 ‘이동하는 집’을 짓는 대신 ‘단 하나의 신’을 섬기는 경향이 강했다. 떠돌이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처지에서 신을 ‘모시고’ 다니다가는 때로 불경(不敬)을 범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다신교 지역에는 고만고만한 성지(聖地)가 곳곳에 흩어져 있는 반면 유일신을 섬기는 지역에는 ‘단 한 곳의 최고 성지(聖地)’가 다른 모든 ‘성지들’ 위에 우뚝 서 있다.

유사 이래 종교는 민족 문화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였고, 오늘날에도 전 세계 민족 분규의 태반은 종교로 인해 발생한다. 다신교도들에게는 남의 유일신도 그냥 여러 신 중의 하나일 뿐이지만, 유일신교도는 다른 신을 용납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유일신을 섬기는 종족이나 민족 사이에는 목숨을 건 싸움이 반복되었지만, 다신교 지역에 들어간 유일신은 상대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정착했다. 그 때문에 인류 사이의 교류가 비약적으로 확대된 ‘대항해 시대’ 이래 유일신교의 세력은 커지고 다신교의 힘은 줄어들었다.

1917년 7월 6일, 동사헌정(현재의 서울 장충동) 어떤 집 마당에서 요란한 징·꽹과리 소리가 울려 나왔다. 집 주인이 딸의 복통을 고치기 위해 인근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인 참이었다. 소리를 듣고 달려간 혼마치 경찰서 순사는 다짜고짜 무당을 체포하고 마당에 차려져 있던 음식과 무구(巫具), 등불까지 모두 압수했다. 체포된 무당은 즉결심판에서 구류 5일에 처해졌다. 이 무렵 일제는 변장 경찰까지 동원해 무당들을 마구 잡아들였다. 민족 문화를 말살하는 데에는 사람을 굴복시키는 것보다는 신을 굴복시키는 편이 훨씬 효과적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신(迷信)의 영역으로 쫓겨난 뒤에도 무속은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다른 종교들에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의 한민족은 종교적 다양성 속에서도 스스로 ‘단일 민족’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거의 유일한 민족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가 다른 영역으로도 확산된다면 한국 사회는 지금보다 더 역동적일 것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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