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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판문점의 공산주의자들 (120) 노련한 현실주의자들

중앙일보 2010.06.30 01:45 종합 10면 지면보기
나는 로런스 크레이기 소장에게 “왜 갑자기 중국어를 배우려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크레이기 소장은 “내 앞에 앉은 셰팡에게 중국말로 인사하려고 그런다”고 대답했다. 남일의 왼쪽에 앉아 나와 마주 보는 이상조, 그 옆에 앉아 역시 상대방을 불편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장평산의 분위기는 터너 조이 제독과 남일을 중심으로 우리와는 대각선 반대쪽에 앉은 중공군이 만들어 내는 그것과는 차이가 너무 컸던 것이다.


베이징의 저우언라이가 개성의 휴전회담을 쥐락펴락했다

1950년 9월 30일 중국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인민정치협상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 그가 이 자리에서 미군의 6·25전쟁 참전을 비난한 직후 중공군 파병을 결정했다. 51년 휴전회담에서도 막후의 의사결정 주역은 저우언라이였다. [중국 해방군화보사]
맞은편에 앉은 미군을 향해 자주 웃으면서 눈인사를 나누는 중공군에 비해 북한군 대표들은 너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어쨌든 비교적 밝은 얼굴과 표정으로 중공군과 대화했던 크레이기 소장은 늘 의미를 알 듯 모를 듯한 미소의 주인공 셰팡에게 친근한 인사말이라도 건네고 싶어 내게 가르침을 요청했던 것이다.



나는 간단한 중국어 인사말을 가르쳐 줬다. 크레이기는 그 다음 셰팡을 만나면서 그 말을 써먹었다. 크레이기가 내게 배운 중국어 인사말 “니하오(你好)?”를 입에서 꺼내자 셰팡의 얼굴이 환하게 펴지면서 입이 크게 벌어지던 장면을 나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셰팡과 덩화가 모든 중공군의 성격을 대표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중국인들처럼 그 둘도 신중하면서 현실적이었다. 나와 이상조, 또는 남일이 동족끼리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인 뒤 마주 앉음으로써 품게 된 심리적인 중압감이 저들에게는 없었을지 모른다. 남의 나라 전쟁터에 뛰어든 점에서, 남북한의 군인에 비해 중공군 대표는 마음의 부담이 작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딱딱하기 그지없던 북한 대표에 비해 중공군은 여러 가지 면에서 노련했다. 명분에 휘둘리지 않고 늘 현실적인 면을 먼저 고려하는 특징이 있었다. 전투에서도 항상 그랬다. 그들은 거창한 싸움보다는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남의 약점을 최대한 드러내는 방식의 싸움을 걸어왔다.



당시 중공군의 최대 약점은 보급과 화력이었다. 그 열세(劣勢)를 그들은 어둠 속에서 상대를 치고 들어가는 기습과 우회, 매복으로 메워 갔다. 정면보다는 측면, 낮보다는 어둠을 택해 상대를 공격했다. 더구나 늘 우리 쪽의 요지(要地)와 요부(要部)를 먼저 탐색하기에 바빴다.



중공군은 그렇게 핵심을 간파한 뒤에는 그쪽으로 대량의 병력을 몰아 인해전술(人海戰術) 식의 파상(波狀) 공세를 펼쳤다.



1958년 11월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북한의 김일성(오른쪽)이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함께 차에 올라타 손을 흔들고 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그해 2월 북한을 방문했다.
그에 비해 북한군은 단순했다. 소련 식의 전투 교범이 그들을 지배했다. 지리적 환경 때문에 늘 평원에서 전투를 벌였던 소련군의 영향을 받아 북한군의 전법은 정면을 치고 들어오는 게 많았다. 1950년 6월 25일의 남침 때도 그들은 38선 모든 전선에서 30분 이상 먼저 야포를 남쪽으로 쏘아댔다. 평원에서 싸움을 하던 소련군의 전법 그대로였다. 그러고서 그들은 물밀 듯 쳐들어왔다.



거센 화력을 앞에 내세우면서 화려하게 상대의 정면을 치고 들어오는 전법이었다. 북한군은 남침을 개시한 뒤에도 모든 전선에서 그렇게 싸웠다. 단지 특기할 사항이라면 늘 독전대(督戰隊)를 동원했다는 점이다. 전선의 맨 앞에 나서는 자기 병사들의 뒤통수를 향해 총구를 겨냥했다.



후퇴는 곧 죽음이라는 공포심을 조성해 자기 병사들을 끊임없이 앞으로 내모는 그 독전대 말이다.



그렇게 북한군은 그악스러웠지만(사납고 모진 데가 있다는 뜻) 중공군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한 전법을 구사했다. 북한군은 직선적이었던 데 비해 중공군 전법은 곡선(曲線)에 가까웠다. 중공군은 늘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과 장단점을 의식해 현실적인 방도를 모색했고 그런 행태는 결국 전쟁터에서의 우회와 기습, 매복과 포위로 나타났다.



당시 내가 휴전회담에 참석할 때 회담 테이블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차이청원(柴成文)이라는 인물이 중공군 회담 대표의 비서장 신분으로 개성 현장에 있었다. 앞에서도 소개한 인물이다. 그는 1980년대 말에 나와 만나 “전쟁 때 미군의 공습이 가장 두려웠다”고 회고했던 사람이다. 서울과 베이징에서 그를 두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내게 “그때의 회담은 사실상 베이징에 앉아 있던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좌지우지했다”고 했다.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의 의사보다는 베이징 당국의 의견이 회담을 이끄는 중심이었다는 얘기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일성의 군대는 당시 모든 전선에서 20%를 감당하는 수준이었다. 전쟁 초반에 기세 좋게 밀고 내려왔다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에 허리가 끊겨 전세가 뒤엎어지면서 거의 재기 불능의 상태로 무너진 북한군이었다. 만주 지역으로 넘어가 다시 부대 건제(建制)를 회복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제 상태가 아니었다. 그에 비해 중공군은 막대한 병력을 한국 전선에 투입했다.



공산 측 전력의 80%를 중공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공군의 입김이 결정적이었다. 그를 뒤에서 조종하는 베이징 당국의 입장이 결국 회담의 진전과 결렬을 가르는 잣대였던 것이다. 상대의 허점을 파고들며 우회와 기습을 잘 노리는 중공군의 전법이 회담장에서도 계속 이어질 분위기였다.



셰팡과 덩화가 보이는 뜻 모를 미소는 회담을 다소 부드러운 분위기로 이끄는 윤활유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복잡한 현실주의적 성향은 회담이 결코 아군의 뜻대로만 펼쳐지기는 힘들 것이라는 점을 예고하고 있었다. 노련한 현실주의자들을 상대할 만한 경륜과 지략이 있어야 했다.



백선엽 장군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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