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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시위는 어디에나 있다

중앙일보 2010.06.30 00:24 종합 34면 지면보기
2003년 영화 ‘러브 액추얼리(Love Actually)’에서 한물간 로커로 나왔던 영국 영화배우 빌 나이를 기억하시는지. 영화에서 리바이벌곡 ‘크리스마스는 어디에나 있어요(Christmas Is All Around)’를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불렀던 그 배우다. 방송에 나와 “시청자 여러분, 마약 사지 마세요. 록스타가 되면 공짜로 줘요”라는 어이없는 멘트를 날리며 방송사고를 내는 ‘늙은 악동’ 역을 했다.



그랬던 그가 지난 주말 주요 8개국(G8)과 G20 정상회의가 잇따라 열린 캐나다 토론토에 나타났다. 이번엔 빈국 여성과 아이들을 돕는 천사 역할을 맡았다. 국제적 빈민구호단체인 옥스팜의 글로벌 홍보대사인 그는 “G8이 빈국을 위해 돈을 더 내지 않으면 교육 등 다른 쪽의 지원금을 모성 보호로 돌려야 한다”며 “엄마의 건강을 확보하자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말아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목청을 높였다.



토론토에선 옥스팜뿐 아니라 다양한 비정부기구(NGO)가 조직적으로 주장을 펼쳤다. 국제구호기구인 월드비전의 한국 활동가도 있었다. 반짝이는 아이디어, 혁신적인 시위가 많았다. G8 정상의 얼굴 가면을 쓰고 임신부의 몸을 형상화한 옷을 입고 벌였던 재미있는 퍼포먼스 사진은 국내 언론을 비롯해 전 세계로 타전됐다. 아동 사망률을 줄이겠다는 G8 리더들의 약속을 빨리 이행하라는 촉구였다.



대중이 열광하는 ‘축구의 힘’을 이용해 빈국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려는 글로벌 캠페인인 ‘원골(1GOAL)’ 그룹도 나섰다. 이들은 “전 세계 7200만 명의 어린이가 학교에 못 가는 현실을 외면하는 G8 정상에 옐로카드를 내밀자”며 노란색 홍보물을 뿌렸다.



캐나다 정부는 이들에게 멍석을 깔아줬다. 토론토 전시장 지역의 디렉트 에너지 센터에 내외신 취재진을 위해 마련한 공식 미디어센터가 있다. 그 바로 앞에 ‘대안미디어센터’를 설치했다. 정부에 할 말이 많은 NGO와 블로거 등 비공식 언론이 현장을 지켜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곳에서 NGO들은 선전물을 나눠주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캐나다 정부는 G8이 열린 토론토 북쪽의 헌츠빌 근처에 아예 공식 시위장소까지 마련했다.



캐나다의 경험은 올 11월 서울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도 참고가 될 만하다. 정부 행사이지만 시민단체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는 열린 자세는 본받을 만하다. 서울 도심에서 행사가 열리기 때문에 장소 등에 있어서 어느 정도 제한이 있을 수 있다. 그래도 NGO나 사회단체들이 제 목소리를 맘껏 낼 수 있는 공간을 내줬으면 한다. 우리 시민·사회단체들은 창조적이고 재미있게 자기 주장을 펼치는 데 경쟁력이 있다. 평화롭던 초기의 촛불시위에는 분명 대중적인 놀이문화 성격이 있었다. G20 서울회의를 앞두고 시민·사회단체와 당국이 함께 노력하면 아직 우리에게 덧칠돼 있는 과거의 폭력시위 이미지를 말끔하게 해소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시위가 G20이 개막하자마자 갑자기 폭력사태로 비화한 건 안타까운 일이다. 경찰차가 불탔고, 스타벅스 유리창이 박살났다. 토론토에서 사상 처음으로 최루탄이 사용됐다. 시민들은 ‘블랙 블록(Black Bloc)’으로 불리는 검은 복장의 극렬 시위대에 충격을 받았다. 현지 방송은 톱뉴스로 이 소식을 전했다.



서울에도 토론토의 ‘검은 시위꾼’이 나타날 수 있다. 다행히 이런 폭력시위에 대한 우리 경찰의 대처 능력 하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 역사적·사회적 맥락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말길은 시원하게 열고 소통하되, 폭력시위꾼엔 잘 대비하자. 우리에게 컨테이너로 쌓은 ‘명박산성’만 있는 게 아니라 월드컵 거리응원 같은 흥겨운 에너지가 넘쳐나는 다양한 시위문화가 있음을 보여주자. G20 의제를 잘 마무리하는 것 못지않게 그런 것도 국격을 높이는 것이다. 토론토 시위가 11월 서울의 치안 과잉으로 이어져선 안 된다. 시위는 어디에나 있다(Protest Is All Around).



토론토에서 서경호 경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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