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 이상 신이 내린 직장은 없다’ 수능 뺨치는 혁신 경쟁

중앙일보 2010.06.30 00:13 부동산 및 광고특집 1면 지면보기
6월 14일 오후 96개 공공기관(공기업) 임직원의 이목은 과천의 정부청사에 쏠려 있었다. 공공기관운영위원회가 경영평가 성적표를 공개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자료가 나오기 무섭게 공기업 직원들은 성적을 보고했다. 이들은 기관보다 기관장 성적을 먼저 챙겼다. “다른 기관 성적은 어떤가.” 비슷한 분야의 공기업 성적을 챙기란 지시가 본부에서 떨어진다. 이들은 같은 업종이나 유형의 공기업 성적표를 찾아 자기 성적과 비교한 뒤 보고했다. 지난 1년간 준비한 경영평가, 공기업들 로서는 ‘대입 수능’이나 다름없다.


공공기관운영위원회 2009 경영평가 성적표를 보니

지난 14일 정부과천청사에서 이용걸 기획재정부 제2차관(가운데)이 96개 공공기관들이 1년 동안 준비한 경영보고서에 대한 평가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핵심 인력 총동원령=“자원봉사활동을 지겹도록 했습니다.”



한 공기업 사장의 말이다. 자원봉사활동 실적을 쌓아야 경영평가 항목에서 1점이라도 더 받는다는 직원 권유를 따르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공기업들은 사실 1년 365일 경영평가를 준비한다. 실적도 실적이지만 이를 보고서에 멋지게 담아내야 한다. 그래서 공기업 경영평가는 ‘멋진 보고서 대회’란 말도 나온다.



공기업들이 지난 3월 12일까지 정부에 낸 경영평가보고서는 500쪽 넘는 분량이다. 이런 보고서를 만들어 내려면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 태스크포스(TF) 상근 팀원이 수십 명에 이르는 공사도 적지 않다.



직원들은 본연의 업무가 아닌 경영평가 보고서 작업에 참여하기를 반기진 않는다. 그래서 나온 게 인사평가에 가점을 부여하거나 특별 휴가를 주는 특전. 일부 공기업은 시간외 수당을 지급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규모가 작은 기관들은 큰 기관들에 비해 불리할 수밖에 없다.



공기업들이 경영평가 보고서 작성에 매달리는 건 기관장의 진퇴 여부가 판가름나기 때문이다.



평가 결과는 임직원들의 급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익명을 원한 공기업 기관장은 “인사나 보수를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기관장 입장에선 경영평가라도 잘 받아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주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털어놨다. 평가보고서를 낸 뒤라고 공기업들이 가만히 있는 건 아니다. 평가단이 찾아올 때마다 공기업엔 비상이 걸린다. 네 차례 이상 실사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실력은 드러난다=보고서를 아무리 그럴 듯하게 만들어도 진짜 실력과 실적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정부도 이런 ‘보고서 포장’ 공세에 맞서 공정하게 평가하기 위한 평가 기술을 연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평가단 구성·운영에 관한 규정’을 만들어 평가단원이 공기업에 연구용역·강의를 하는 것을 금지하고, 윤리서약서나 상피제 서약서 등의 제출을 의무화하고 있다. 정부는 여기에 평가결과에 대한 이의신청 기회를 줘 피평가기관들이 수긍하는 평가를 한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기획재정부는 평가결과의 예측가능성을 높이고 보고서 작성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비계량지표 비중을 축소하고 계량지표 평가비중을 확대해 왔다. 경영실적 보고서 작성분량 및 양식 등에 대한 관리도 강화하고 있다.



◆혁신 성과가 평가 좌우=공공기관 경영평가는 책임 경영을 확보하고 경영의 효율성을 높여 국민 부담을 줄이는 데 목적이 있다. 정부의 개혁 의지가 밑바탕에 깔려 있는 셈이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공공기관 선진화는 현 정부의 핵심 추진 과제로 국민이 많이 지지하며 집권 후반기에도 강력히 추진하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정기적인 경영평가는 공기업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효과도 거뒀다. 흔히 ‘신이 내린 직장’이나 ‘철밥통’으로 불리던 공기업들이 조금씩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방만한 경영으로 나랏돈을 물 쓰듯 하면서도 고액 연봉을 챙겨 비판을 샀던 공기업들에 대해 정부는 개혁을 밀어붙였다. 그 긍정적 변화의 신호들이 감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점수를 잘 받는 비결은 역시 ‘가열찬 혁신 노력’이다. 공기업들은 경영효율화를 통해 정원을 감축했다. ‘신이 내린 직장’이라는 단골 비판의 대상이 되던 공공기관 임직원의 보수체계가 바뀌어 기관장 및 감사의 연봉이 확 줄었다. 공공기관 대졸 초임 수준은 낮아졌다. 비합리적인 단체협약들도 견제를 받아 고쳐지고 있다. 복리후생비 등 방만해질 소지가 있는 경영정보가 공개돼 정상화의 자극제가 되고 있다. 불법행위를 한 직원을 온정주의로 감싸다 다시 유사사례에 빠지곤 했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공기업도 늘었다.



공공기관은 그동안 오래 근무하면 자연스럽게 급여도 높아지는 호봉제였다. 성과와 능력을 높이기 위한 동기 유발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최근엔 성과급 연봉제 도입이 늘었다. 동일 직급에서도 연봉차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공기업은 비효율과 비실용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개혁을 통해 ▶공기업 운영에 소모되는 막대한 혈세를 아끼고 ▶값싸고 질 좋은 공공서비스를 국민에게 제공하며 ▶공기업의 이미지를 혁신해 공공 부문의 국제경쟁력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정권 실세와 가깝다는 이유로 기관장 자리를 차지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경영을 못하면 금방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는 교훈도 주었다. 지방선거 이후 정부는 공기업 개혁을 더욱 강력히 추진할 계획이다.  




<그래픽을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허귀식·권호 기자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