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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우리 나전, 바젤서 반짝반짝

중앙일보 2010.06.28 00:13 경제 22면 지면보기
‘자개(나전)’처럼 한국인의 심금을 울리는 소재가 있을까. ‘모모네 집 안방엔 10자짜리 자개장이 있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부유한 어느 집의 정경을 묘사하는 데,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세월이 흘렀다. 요즘 젊은이들은 십장생과 당초 문양의 자개장을 진부하다고 말한다. 하나 조개는 장식 소재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쓰지만 우리처럼 그렇게 화려하고 영롱한 이면을 살려내 쓰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나전을 다루는 우리의 솜씨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문화유산이다. 그래서일 거다.



요즘 나전은 젊은 작가들의 손에서 새로운 디자인으로 탄생해 다시 돌아오고 있다. 그리고 나전 작품은 이번 스위스 바젤에서 열린 ‘디자인 마이아미/바젤’을 통해 당당히 세계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세계 최고급 컨템포러리 디자인의 경연장에 나선 우리 나전에 대한 세계인의 반응은 어떨까.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바젤로 날아갔다.



바젤=양선희 기자

사진=김상선 기자 sskim@joongang.co.kr> 작품사진 제공=갤러리 서미



개막도 되기 전에 팔린 옥토퍼스



디자인 마이애미/바젤에 전시된 흰색 진주패로 만든 나전 벤치. 강명선 작품
디자인 마이아미/바젤엔 세 점의 나전 의자와 벤치가 진열됐다. 흰색 진주패로 상단을 빼곡히 덮은 벤치 두 점과 검은색 우주선처럼 생긴 의자 ‘옥토퍼스’였다. 화학재료인 유리섬유강화플라스틱(FRP)에 자동차 도장을 한 몸체(보디)에 자개로 장식한 작품이다. 벤치는 강명선(36), 옥토퍼스는 이삼웅(29) 작가의 작품이다.



푸른색을 띠는 나전을 동그란 패턴으로 만들어 붙인 의자 ‘옥토퍼스’. 이삼웅 작품


이삼웅 작가가 만든 나전 장식의 헬멧.
행사의 정식 개막 하루 전인 14일. 언론과 VIP를 위해 전시장은 사전 공개됐다. VIP 공개가 이루어진 직후, 이 작품을 내놓은 갤러리 서미의 관계자는 “옥토퍼스가 팔렸다”고 알려줬다. 한 유명 스위스 건축가가 이 의자를 보자마자 계약을 하고 돌아갔다는 것이다. 벤치도 디자인 페어 기간 중 터키의 컬렉터에게 팔렸다. 이들이 사간 이유는 ‘새롭고 예쁘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오래된 소재인 나전은 이들에게 ‘신선한 소재’로 다가갔다.



갤러리 서미의 맞은편 부스는 빈티지 가구를 전문으로 하는, 프랑스 파리의 ‘갤러리 페린’이었다. 이 갤러리에선 조개로 장식한 18세기 이탈리아 작품 두 점을 내놨다. 이 갤러리의 담당자는 자개 의자를 가리키며 “저것도 조개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조개를 저렇게 활용한다는 게 재미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갤러리 서미 부스에서 나전 작품을 본 서구인들은 “흥미롭다(interesting)”고 했다. ‘원더풀’ ‘판타스틱’이라는 반응까지는 아니었다. 신선하고 흥미로운 작품. 세계 시장에서 나전은 이렇게 잔잔하게 시작했다. 그 이상의 평가는 작가들의 아이디어와 창의적 디자인으로 끌어내야 할 부분으로 남았다.



나전을 전통에서 해방시키다





강명선 작가는 원래 목공예를 전공했다. 하지만 자개 소재를 사용하면서 나무를 버리고, FRP를 사용한다. “그릇 하나에 몇 달씩 쏟아 붓는 장인정신으로 만드는 작업 과정은 현대 디자인에 맞지 않아요. 좀 더 쉽고 캐주얼하게 소재에 접근하기 위해 보디는 화학 재료를 사용합니다.” 그는 십장생과 꽃 문양의 전통 패턴도 버렸다. “패턴과 형태가 바뀌면 소재에 대한 느낌도 달라져요. 나전제품을 진부하다고 하는 건 전통문양 때문입니다. 현대적 패턴으로 바꾸기만 해도 느낌은 확 달라지죠.”



요즘처럼 미니멀리즘이 강세인 가구디자인 세계에서 이 번쩍거리는 소재는 과연 경쟁력이 있을까. “모든 가구가 미니멀하게 보이려고 애쓰는 지금의 현상을 역이용하면 됩니다.” 이삼웅 작가의 대답은 명쾌했다. 진주와 태생이 같은 나전을 더욱 반짝거리게 다듬어 보석처럼 만드는 게 포인트라고 했다. 보석에 대한 동경이 인간의 마음 속에 있는 한 반짝이는 소재는 결코 도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전통을 발전시키려는 게 아니에요. 과거부터 쓰던 소재를 가져다 쓰는 것뿐이죠.” 그는 나전은 가구 소재일 뿐 아니라 패션 소재로도 그 가능성이 무궁하다고 했다. 그래서 최근엔 디자이너 이상봉씨와 함께 헬멧이나 패션에 나전을 접목시킨 작품도 만들어 파리와 러시아에서 패션쇼를 했다. “나전을 세계화하는 거요?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면 됩니다.” 20대 젊은 작가 이삼웅이 내놓은 해법이다.






바젤의 한국 작가들

칠보를 히피 스타일로 재해석한 캐비닛·의자도 있네




한국인 가구 디자이너 이광호(29)는 미국 뉴욕의 존스턴 트레이딩 갤러리의 대표작가로 ‘디자인 마이아미/바젤’에 참가했다. 그는 전선과 고무 호스를 꼬아서 만든 전등과 가구로 유명한 작가다. 그가 이번에 내놓은 작품은 적동에 칠보를 입힌 캐비닛(사진)과 의자들이다. 정교하고 고운 전통 소재인 칠보를 거친 히피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용접 부위도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적동 캐비닛 문짝에 흰색과 파랑·초록색의 칠보로 칠갑을 해놨다는 표현이 적당한 작품이었다.



“칠보를 배울 때 여러 가지 까다로운 금기 사항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작품을 하면서 다 무시했죠. 칠보가루는 섭씨 700도에서 녹는데 온도가 달라지면 색깔도 달라지고, 모든 게 달라져요. 그런데도 작품이 나오네요.”



이 같은 그의 막무가내 정신은 미국의 히피 스타일 디자인을 선호하는 존스턴 측과 딱 맞아떨어졌다. 칠보 작가들의 관점에서 보면 ‘칠보를 망친’ 그의 작품은 많은 관람객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관람객들은 그의 작품 앞에만 가면 갤러리스트들을 붙들고 작품 설명을 요청했다. 하지만 존스턴의 갤러리스트들도 이 작품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진 못했다. 그래서 기자가 나서서 “이건 한국의 칠보라는 공예기법을 활용해 새롭게 재해석한 것”이라고 한 초로의 신사에게 설명해줬다. 그 신사는 “단순한 페인팅이 아닌 건 알았다. 매우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했다.



이광호 작가 외에도 프랑스 파리에서 온 다운타운 갤러리는 한국의 최병훈 홍익대 교수의 책상과 유럽에서 활동하는 한국 도예가 김혜영씨의 도자기 작품을 들고 디자인 마이아미/바젤을 찾았다.






“동양적 감성에 현대적 기능 갖춰야 통한다”

‘디자인 마이아미/바젤’ 갤러리스트가 본 한국 작품




알렉샌드라 커닝햄, 에반 스나이더만, 프랑수아 라파뉴(왼쪽부터)
세계 고급 디자인 시장에서 한국 디자인 작품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그리고 그 시장에서 한 자리 차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디자인 마이아미/바젤’에 참여한 갤러리스트들과 이 디자인 페어를 주최하는 사무국 디렉터와 이야기를 나눴다. 디자인 마이아미/바젤 디렉터 알렉샌드라 커닝햄(이하 알렉샌드라), 미국 뉴욕의 갤러리 R 20th 센추리 대표 에반 스나이더만(이하 에반), 프랑스 파리의 갤러리 다운타운 대표 프랑수아 라파뉴(이하 프랑수아)가 그들이다. 알렉샌드라는 지난해부터 이 디자인 페어에 참여하고 있는 갤러리 서미를 통해 한국 작품을 접했다고 했다. 에반과 프랑수아는 각각 한국 작가 특별전을 여는 등 한국의 디자인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이다. 이들의 눈에 비친 한국 작품의 경쟁력과 세계 시장 진출 전략을 정리했다.



한국 디자인의 강점은



“한국의 디자인은 새롭다(something new). 디자인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건 매우 힘들다. 그런데 한국의 디자인은 그걸 해낸다. 오래된 공예 기술과 고대 세계의 정신 등 뭔가 독특함이 배어 있다. 여기에다 현대적 디자인을 입히는 기술도 뛰어나다. 독특하고, 가볍지 않고, 깊은 문화와 정신이 배어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컬렉터들이 원하는 것이다.”(에반)



“중국의 디자인은 혼란스럽고, 일본의 디자인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그에 비해 한국은 동양적 색채를 띠면서도 현대적이다. 유럽인은 동양의 정신과 문화 유산의 분위기는 좋아하지만 바로 그 디자인을 사려고 하지는 않는다. 한국 디자인은 그 절충점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최병훈의 책상은 독특한 곡선과, 나무가 아닌 돌로 만든 다리 등으로 동양적 분위기를 남겼지만 쓰임새는 서구적이다.”(프랑수아)



한국 작품이 서구인에게 팔릴까



“이헌정의 도자기 가구를 뉴욕에서 전시했을 때 뉴욕 타임스도 매우 큰 관심을 가졌고, 사람들도 아주 많이 몰렸다. 그리고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팔렸다. 요즘 컬렉터들은 한 분야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배경을 가진 작품들을 섞어서 소장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시점에 한국 디자인은 그들이 원하는 독특함을 제공할 수 있다. 한데 컬렉터들은 늘 작가가 누구냐에 관심을 둔다. 시장에 이름을 알리는 게 중요하다. 또 처음 시장에 들어올 때 가격 정책도 유의해야 한다. 아직 한국 작품의 가격은 너무 높게 책정할 때가 아니다.”(에반)



한국의 전통공예 작품에도 관심이 있나



“한국의 전통 가구 등은 독특하고 매력적이지만 유럽 시장에서 팔아보려고 시도하진 않을 거다. 유럽인들은 200~300년 전의 빈티지 작품은 유럽의 것이 최고라고 믿는다. 또 생활양식이 다른 만큼 한국의 옛 디자인이 유럽시장에서 통하긴 힘들다.”(프랑수아)



공예와 디자인은 무엇이 다른가



“공예는 얼마나 기술을 정교하게 구사하느냐가 관건이다. 하지만 디자인이 같은 가구라도 현대성(Contemporary)이 우선시 된다. 소비자(컬렉터)와 교감하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야 한다. 또 새로운 컬렉터들을 개발하기 위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전통적 방식을 빌어오더라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접목하는 것이 디자인 작품이다.”(알렉샌드라)



더 많은 한국인이 디자인 페어에 진출하려면



“견본시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하지만 두 가지 조건을 완비해야 한다. 첫째는 질적으로 우수하고 새롭고 창의적인 작품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계속 더 나은 작품을 내놓기 위해 끊임없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점이다. 동양적인 감성에 현대적 기능과 감각을 갖춘 작품들을 끊임없이 새롭게 소개하는 힘을 갖춘다면 어디에서나 환영 받을 수 있다.”(알렉샌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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